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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깨어 있는 자아(임영훈)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5-14 14:10
조회
935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어렵고 포괄적인 글은 쓰지 말자면서도 주제를 찾다 보면 가끔 삼천포로 빠진다. 일상에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통시적으로 파악하고픈 욕심이다. 통찰은 언감생심, 결국 미로에 빠져 헤매고 만다.


 결국 경험적, 미시적으로 가깝게 볼 수 있는 일상사를 찾다가, 그만 인간 관계에서 시작한 글이 자아와 사회라는 거시 경제학(?)이 된다.


 사람 사이란 뜻의 인간이 그대로 사람이란 뜻으로 쓰일 정도로 사람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 ‘인간 관계’란 익숙한 말에는 인간에 관계가 마치 한 단어처럼 따라붙는다. 그만큼, 관계는 선택 같은 필수다.


 태어나면 관계의 연속이다. 부모 이외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몇몇 기억들이 떠오른다. 열 살도 되지 않았던 저학년 때에도 반장을 맡을 리더 어린이가 있었고, 점점 서로의 외모 등을 인식하면서 잘 생기고 예쁜 친구가 누구인지, 공부나 운동은 누가 잘 하는지 구별해갔다. 고학년인 10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이런 구분과 등급은 점점 명확해지고 부러움과 더불어 시기, 질투 등도 커지기 시작한다. 남학생과 여학생 간 미묘한 분위기도 싹트고, 한 쪽만 마음이 있는 짝사랑 같은 사랑의 짝대기가 생겨난다. 공부를 잘하거나, 패션 감각이 있거나, 주도적이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잘 놀거나 등 내세울 게 있는 아이들은 이성에게 인기를 끌고, 그룹을 만들어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내성적이거나, 자신감이 없다면 무리 짓거나 그룹을 형성하기 쉽지 않다. 결국 ‘inner circle’에 안착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어딘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결핍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열 살 전후로 느꼈던 ‘inner circle’의 진입 장벽은 일종의 인간관계의 고비였다.


 나는 쉽게 다수에 섞여 어울리는 체질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졸업 문집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각자 짧게 자기소개를 하는 란이 있고 몇몇은 그림이나 글재주를 자랑하기도 했다. 모두에게 공통되는 짧은 소개 글에는 공통 질문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6학년이래봤자 만 12세의 어린이였는데, 많이 나온 답은 이랬다. ‘돈, 여자, 남자, 직업, 가족, 건강, 성적’ 등등. ‘꿈, 희망’ 같은 이상적 단어도 있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너무 옛날이라 일일이 기억하긴 어렵지만. 무엇보다 아직 어린이였는데도 대부분의 답들이 상당히 (내가 보기엔) 속물적이었다.


 나는 ‘아내, 종교, 음악’ 이라고 썼다. 어린이가 적었다니 어색한 감이 있지만, 담임선생님은 입이 닳도록 칭찬하셨다. ‘여자’라고 적은 다른 답들과 ‘아내’라고 적은 것은 다르다면서 그 부분을 강조하시기도 했고, 나머지 둘도 그런 것을 쓴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청년 성가대를 10년 넘게 한 걸 보면 별 것 같지 않던 문집이 타고난 성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나침반이었다.)


 동시에 선생님은 내가 현실 감각이 없다며 걱정을 하기도 하셨다. 수업 시간에 앞으로 뭘 하고 싶냐는 주제가 나와서 다들 이런저런 장래 희망을 말하고 있는데, 내 차례가 오자 문득 낡은 건물들에 페인트칠을 해주고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시 어린 눈에 비친 서울의 건물들이 전부 낡거나 우중충하고, 지금처럼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건물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게 무슨 미래에 실제 갖게 될 수 있는 직업을 얘기한 것도, 현실적 답도 아니었기에 선생님은 나의 몽환적 답변을 타박하셨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실소인지 한숨인지 황당해 하는 반응도 있었다. (아직도 동창 모임에 나오는 여자 동창이 그 중 한 명이었다. 뒤를 돌아다보기까지 했었기에 기억이 난다.)


 이런 나만의 색깔과 가치관, 주관 덕분인지 친구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더하여 TV를 사회악으로 여기는 집에서 자라 연예인들 신상으로 이어지는 또래들의 수다에 대화 주제가 없다시피 했다. 여러 면에서 어딘가 특이한 애로 인식되었고, 성적이 나오는 편이었지만 온통 성적에 목을 매는 상위권과도 그렇게 통하지는 않았다.


 내 안에는 점수에 목을 매는 교육 환경과 더불어, 점수에 목을 매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까지 똑같은 괴물로 그려져 있었다. 비판 정신을 뱃속부터 타고났는지, 교육 현실을 비난하는데 열을 내곤 했다. 입시 교육이 시작되는 중학교에 올라가자 학교가 즐겁지 않았고, 배우고 익힌다는 본연의 공부에는 뜻이 없고 온통 시험 점수에 목을 매는 학교에 호감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는 물론 나 또한 점수가 중요했지만) 결국 나는 어디에도 섞이기 힘든, 회색분자와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환경의 평범한 학생, 나 또한 입시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음에도, 스스로를 떼어내어 거대한 실패작인 한국의 교실에서 자신을 분리시켰다.


 십대 시절 형성된, 관계의 단절이 가져오는 외톨이의 삶은 그 후의 시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질만능주의와 성적 지상주의를 생각 없이 받아들여봐도, 이미 형성된 ‘나’는 그렇게 쉽게 속물로의 카멜레온과 같은 변색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와 주변의 색은 매번 어딘가 달랐으며, 그럴듯하게 섞여서 숨어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보란 듯이 드러나서 뭐라도 문제를 일으키고는 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아니면 이익 사회의 영역이든, 다수의 사고는 다수가 맞음을 강변하면서 소수를 돌연변이 취급하고 사사건건 억누르게 마련이다. 그게 다수의 생존 방식이다.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봐’라던지, ‘거봐, 니가 틀렸지’라며 다수결을 강요하게 된다. 그렇게 다수는 다수가 지배하는 체계를 공고히 유지하려 한다.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게 된다면 다수가 가지는 우월성은 근거 없이 흔들릴 위험에 처한다. 이것은 또한 관계에 중점을 두는 인간 사회, 특히 동아시아 사회를 이루는 축이 되므로 일종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마치 순환 출자와 같이 돌고 도는 자체 순환의 고리가 꽤나 튼튼하게 엮여 있는데, 한 쪽이 끊어져도 결국은 이어져서 계속 돌게 되는 아주 강한 매듭의 반복이다.


 내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고만 해도 우군이 필요한데, 대부분이 특정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기에 그게 정답이고 정상이며, 내 편은 없었다. 예를 들어, ‘입을 옷이 있는데 왜 옷을 또 사?’와 같은 질문을 하면 모자란 취급을 받게 된다. 어느 사회이건 기존에 형성된 사고틀이 굳어 있기 때문에, 어떤 질문이던 간에 질문 그 자체로 평가되기 이전에 사회의 관습으로 먼저 재단된다. 공고한 선입견이 그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강한 틀이고,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적절히 따르고 즐기고, 적절히 진보적인 척 반항도 하다가, 대체로는 인정받으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적어주는 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뭐든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맨날 헤헤 웃으며 맞춰주는 사람이 아닌 자는 이렇게 매사가 힘들고 삶 자체가 버겁게 된다. 좌파 시민단체에 참석해도 주장에 동의가 안 되면 자기 할 말을 하게 되고, 우파 기업인들과의 업무 미팅에서도 자기 색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스폰지가 되기는 힘들다. 반대로 스스로를 버리고, 다수에 맞춰가는 이는 관계의 달인이 될 수는 있다. 문제는 정작 그 자신의 정체성인데, 따지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꿋꿋이 다수의 횡포에 항거하면 자아를 지키지만 관계의 구성에 걸림돌이 있는 것과 대비된다.


 여기에 고민이 싹튼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선 이러고 저기선 저러는 카멜레온처럼 살아갈 것인지, 생존의 본능은 무조건 관계를 택해서 후자로 갈아타라고 권한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무리짓기를 하는 동물들의 본능이다. 생물학적으로 무리에서 소외되는 것은 곧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는 죽음을 의미하기에,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에게서 개체를 소외시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한다. 실제로 무리 동물 중 무리에서 어떤 이유로든 떨어져 나간 개체는 혼자서 생존하기보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 무리에 껴주지 않고 왕따를 시키는 것은 그의 영혼의 심장을 떼어내어 길거리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경제적으로는 살 수 있어도 상당수가 자살을 택한다.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된 경우,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관계망이 소실되어, ‘사회적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그래도,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는 안창호 선생의 말처럼, 나의 신념을 믿고 부러지더라도 혼자 가는 게 옳은 일일까. 나도 사람이기에, 생각에 오류가 있을 것이고, 그것만 고집하는 것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외부의 생각들에 내가 오염된다고 여길지, 아니면 그런 여러 자극들에 의해서 외골수의 생각이 다듬어진다고 판단할 지는 여전히 너무나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고, 복잡의 끝을 달려가는 세상에서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취하는 것조차 갈수록 어려워진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다양한 뉴스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난해한 퀴즈를 매일 풀며 하루하루 넘어가는 줄타기와 같다.



사진 출처 - 티스토리 블로그


 그래도 스스로에게 개인의 신념과, 자기 자신의 사고의 완결성을 믿으라고 하고 싶다. 이 말은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주입되는 일련의 지침들을 무작정 따르지 않고, 어떤 분위기를 타고 휩쓸리는 열풍 등에 무심코 올라타지 않기를 바람이다. 내가 맞다고 믿는다면,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도 꺼내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바람이 불어 다수가 특정 사안에 휘말려 혈안이 된다 해도 자신은 부러 그 바깥으로 나와 침착하거나 외려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냄비 끓듯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회 현상들을 보면 못내 씁쓸하다. 중국, 일본과 더불어 인간 사회에서도 가장 관계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사회여서 그런지, 낡은 동아시아 관념을 타파하려는 이들조차도 실제로는 동아시아적 행동 패턴을 보인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개인의 구체적 동의를 구하기보다는, 진영 논리로 세를 모아 반대편을 박살내는데 열을 올리거나, 힘 대 힘으로 밀어붙여서 상대방을 밟고 승리를 쟁취하는데 혈안이 돼있다. 이젠 이게 대세다, 이젠 우리가 다수다, 이젠 우리가 주류다, 이렇게 외치면서 기존의 주류를 비주류로 몰아 힘으로 억누르려고 한다. 모두가 같은 의견인양 세의 확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각 개인의 다양성은 무시 되며, 강성이 아닌 회색분자와 같은 온건파들은 공격 일변도의 전선에 도움이 안 되므로 내부의 적으로 취급된다.


 사용자 없는 노동자가 없듯, 남성이 없다면 여성이 없다. 그렇지만 현실의 주장들은 한쪽을 끊임없이 공격해 힘을 못 쓰게 만들어버리면 자신들이 살아날 것처럼 자극한다. 과격한 단체일수록 내부의 이견을 틀어막아 그 순수성?을 유지하겠지만, 다수의 힘을 빌어 관계를 담보로 결집을 유도하는 건 자신들의 비판의 대상과 닮아 있다. 결국은 왜곡된 구조를 바꾸겠다는 이상은 구호에 그치고, 실상은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겠다는 권력 투쟁으로 흘러간다.


 물론 맨날 얼굴을 봐야하는 나의 소속 단체 안에서 부딪히지 않고, 순종적으로 인정받는 관계만 고민하는 게 현실적으로 개인에게 무조건 이득이다. 언제 볼지 모르는 외부인이나 전체 사회를 걱정해줄 필요가 없고, 하다못해 외부와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우면 내부에서 나에 대한 지지와 환호는 늘어간다. 나의 행동반경이 당연하게도 내가 속한 계급과 계층에 한정되기에 이런 맹점이 나온다. 마치 전체 사회를, 인류를, 지구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나와 내 이익집단의 이익을 강변하고, 작은 관계가 큰 관계를 집어삼키는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개인과 사회는 새로운 사고와 물결에 힘을 얻기보다는 병들어 갈 것이다. 세계와 미국을 고치겠다던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로 세계와 자국을 외려 병들게 하듯이, 집단 이기주의는 내 집단에도 결국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 우리 정당과 우리 단체, 우리 가족,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이익만을 극도로 추구하게 될 때 파국의 결과는 과거의 당파싸움과 현재의 국회 등을 보면 답이 나온다.


 그래서 가급적 많은 이의 자아가 깨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이었으면 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타인과 소통이 되는 것, 어려운 일이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복잡성이 극한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서로 간에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공존이 되기 위해서는 독립된 자아와 유연한 소통이라는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함을 느낀다.


 거대한 사회악이라고 낙인찍은 기득권의 축들, 1등 신문, 만년 여당, 막강한 경제력의 기업 집단, 역사를 독점해왔다는 남성들, 구체적으로 얘기해보면 ‘사기’ 탄핵을 당했다는 전 대통령과 감옥 뒷바라지까지 하며 추종하는 이들, 셀 수 없이 많은 가상의 적들과 기득권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임의로 비정상들을 선정하고 차례로 제거한다고 내가 정상이 되고 사회가 정상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바로 내가 정상이고 네가 비정상이라는 단순한 전제이다. 상대방이 볼 때는 그대로 거꾸로 국면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열고 고쳐주겠다며 마주 보고 확성기를 튼 채 일장 연설을 하니 적절한 선의 이해라는 건 가능하지 않고, 타도의 대상으로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세상은 복잡하다. 내가 ‘안티 조선’ 모임에 가입해 있더라도, 조선일보에 다니는 친구가 있을 수 있다. ‘안티 조선’ 모임 안에서도, 생각이 다를 때는 이 건은 그렇게 몰아갈 수는 없다고 조선일보를 변호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집단에 소속돼 있더라도 독립된 꿋꿋한 자아, 당파성이 제외된 바로 그 ‘개인’이 갈수록 아쉽다. 이런 유연함이 자아를 지키면서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담보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노자의 ‘상선약수’, 유가의 나라에서 물처럼 쉽게 버려져 온 그 한 마디가 절실하다. 위로 올라가 지배하려는 사람만 보일 뿐, 아래로 흘러 바탕이 되려는 사람, 그런 단단하고 우직한 개인의 가치가 갈수록 중요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