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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 대한 사념(私念)(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5-12 14:29
조회
115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랫동안-거의 35년 가까이- 잊고 지냈던 ⌈나와 너⌋를 떠올리게 된 것은 15개월 이상 지속된 ‘코로나19’ 사태 때문이었다. 철부지였던 시절 연애편지 쓰려면 이만한 책이 없다는 선배의 꼬임으로 산 그 책은 물리적 수명을 다하고 버려졌지만, 책이 전해준 실존적 메시지는 아직도 기억의 인화지에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나’ 그 자체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나와 너(Ich und Du)’ 사이의 나> 아니면 <‘나와 그것(Ich und Es)’ 사이의 ‘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려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언제든지 대상이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도구적인 관계인 반면에,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낯으로 사람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의 나는, 1)인간은 나 홀로 존재하거나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이며, 2)그 관계가 <나와 ‘그것=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대=사람’의 관계>가 될 때,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 된다는 부버의 두 전언 가운데 후자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사랑할 때, 나는 너로 인해서 나가 되고, 너 안에서만 나가 된다. 삶이란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그 만남이 사랑의 만남일 때 자신이 사람답다고 실감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마스크 없이 사람을 만나던 시절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지금의 나는 관계 속에서만 참된 자아와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앞의 전언에 더 끌린다.


 만남 자체가 제한되면서 관계 지향적인 인간의 존재 조건이 위축되면, 인간은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기 쉽다. 신독(愼獨)이란 나에게는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래서 객관적 현실에서 관계 맺음이 어렵다면 관념적 현실에서라도 ‘사람 관계’를 떠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는 그 욕망에 졌고, 아래의 사념은 그 패배의 흔적이다.


부모와의 만남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이치(理致)라는 게 있는 것만 같다. 향유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 절감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부모 중 한 분이 최근에 식사량이 줄면서 몸무게가 부쩍 줄었다.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면서 디스크와 관절염이 심해져 걸음걸이조차 힘들어졌다. 매주 찾아뵐 때마다 기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만큼 그분의 은혜가, 아니 존재 자체가 얼마나 중(重)한지를 절감한다. 나는 인간이 벌이는 모든 일은 헛되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라는 냉소적 주장을 믿지 않는다. 순진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근거는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타이르고, 자신의 고통보다 자식의 편안을 늘 앞세우는 부모의 존재다. 그분들은 사람이 학교에서 자연의 물리나 역사의 이치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해서 인생에서 세월의 속절이나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인들이다. 부모라는 존재, 그들과의 만남은 낙관적 역사의식의 근원이지 싶다.


스승과의 만남
 6개월 만에 죽마고우 둘과 스승을 모시고 막국수와 감자부침으로 점심을 했다. 중학생 때부터 뵌, 은사(恩師)라는 말에 실감을 불어 넣어준 스승과의 그 자리에서 나는 마음 놓고 편안할 수 있었다.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떼어내고, 개인적으로 방심(放心)해도 무방한 사람들과 함께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힘이다. 경제적 타산성이나 공리주의적 유용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의미의 무용한 관계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청춘과의 만남
 ‘코로나19’ 사태에도 어쨌든 학교 강의는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으로든 오프라인으로든 청춘들을 만나는 일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친구는 이런 감각이야말로 늙었다는 증거라며 나를 타박했지만, 선생-학생이라는 일종의 위계관계를 전제로 한 만남일지라도 나에게 청춘을 만나는 일은 늘 흥미진진한 일대 사건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민태원, 「청춘예찬」)이기에 청춘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밝고 환한 빛이 난다. 그들을 보기만 해도, 시절은 엄혹했고 마음은 싸움에서 빗겨 있다는 부채 의식에 사로잡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던 나의 이십 대가 뒤늦게나마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든다.



사진 출처 - freepik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이상과 희망을 추구하는 ‘속성’이라는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전언에 마음이 혹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의 나이 때에는 몰랐고, 그들의 처지였을 때는 깨우치지 못했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려는 이상과 희망>을 견지하는 늠름한 후속세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설렘을 자아낸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절에도 마음이 따뜻하면 몸은 견딜 수 있다는 세속적 트임 혹은 자기-주술적 주문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서둘러 약삭빠르게 사는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 깨우침이라는 게 생기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는 걸 이제야 절감한다. ‘바이러스와의 관계’ 말고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인 때가 지금 더욱 그리운 이유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