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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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구 국방부 장관께(경향신문, 2017.02.09)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58
조회
156
1998년 2월24일에 누군가 태어났다면, 그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될 겁니다. 아니면 직장에 다니거나, 군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19년. 한 생명이 태어나 장성할 만큼 긴 세월입니다.


그날 낮 12시20분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총성 한 발이 울립니다. 권총 M9 베레타에서 나온 총알이 소대장 김훈 중위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김 중위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인은 분명했으니, 자살인지 타살인지만 밝히면 그만이었습니다.



[오창익의 인권수첩]한민구 국방부 장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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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께서도 알고 계시듯, 사망사건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주검과 사건 현장입니다. 총에 묻은 지문, 총과 손에 묻은 화약가루, 총알의 방향, 총이 놓인 위치, 그리고 밀착사인지 근접사인지만 밝히면 금세 결론을 낼 수 있었습니다. 사건 직후, 군 당국은 김 중위가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그건 지문, 화약가루 등 핵심적인 증거들에 기초한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관행적 추정이었을 뿐입니다. 기껏해야 김 중위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는 게 자살의 근거였습니다. 그나마 사건 발생 일 년이 지난 뒤에서야 밝혀낸 ‘사실’이었습니다.


김훈 중위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거나, 그의 아버지도 같은 사관학교 출신의 예비역 3성장군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등의 자살하지 않을 만한 정황들도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주검과 현장입니다.


그날 1998년 2월24일은 50년 만의 정권교체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니, 판문점처럼 첨예한 지역에선 별 일 없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 강박 때문에 자살로 조작한 건지, 아니면 기초적인 조사가 부족해 그냥 지나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첫 단추는 그렇게 꿰어졌습니다.


김 중위 사건이 여론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군 당국은 셀 수 없이 많은 조사를 반복했습니다. 특별조사, 합동조사 등 명칭은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조사 결과는 한결같았습니다. 바로 자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김 중위 가족이나 저처럼 김 중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사람은 물론, 대법원, 국민권익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방부 밖의 국가기관들의 결론은 언제나 딴판이었습니다. 결코 자살일 수 없다거나, 범인을 특정할 수 없으니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거나, 초동수사가 부실해 자살인지 타살인지 가릴 수 없다는 결론들입니다. 사건은 하나인데, 사건에 대한 결론은 군의 안팎이 매번 달랐습니다.


이쯤 되면,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군 당국의 조사 결과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게 당연할 겁니다. 물론, 장관님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요. 국방부 특별조사본부를 비롯한 관련 부서들에선 꾸준히 김 중위가 자살했다는 보고만 반복할 테니까요.


유가족, 언론, 인권단체와 국가기관까지 나서 김 중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각도로 밝혀냈지만,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지 19년이나 지났지만, 김 중위의 장례는 아직도 치러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중위는 벽제 보급대대 창고 한쪽 구석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은 유가족의 고통은 곁에서 지켜보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자식의 죽음도 힘겨웠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은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 등의 국가기관들은 군 당국이 유족에게 사과하고 김 중위는 순국으로 인정하는 등의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군 당국은 그저 요지부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국방부에 묻고 있습니다. 장군의 아들도 군에서 죽으면 저런 취급을 당하는데, 평범한 젊은이들은 오죽하겠냐는 질문입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님! 김훈 중위 사건은 오래된 숙제지만,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부담도 없습니다. 김 중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다고 군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도 없고, 그 때문에 전력이 떨어질 일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국민권익위원회 또는 대법원의 결정만 좇아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유족의 상처가 아물진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국가와 군은 그저 강도떼에 불과하다는 오명에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김 중위의 아버지 김척 장군이 자주 인용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국가에 정의가 없다면, 강도떼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는 우리 체제가 1600년 전 교부의 말에 기댈 만큼 허약하지 않다고 믿고 싶습니다. 아니, 제 바람과 별개로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김 중위 사건은 그저 장관님의 결단만으로도 얼마든지 해결 가능합니다. 지금도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결해야 합니다. 김 중위 가족의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김 중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다시는 이런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관련 업무를 혁신하면 됩니다. 난제처럼 보이더라도, 오로지 진실의 편에만 서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군에 자식을 보낸 부모의 억울함을 덜고, 우리 공동체가 다만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도록 하는 게 바로 장관님의 소임입니다.


장관께서 김훈 중위 사건을 공명정대하게 푼다면, 그건 군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고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우리 군의 미래가 여기 달려 있습니다. 병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무기체계를 운용하는가도 중요하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건, 군이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겁니다. 그게 가장 큰 전력이고, 그게 가장 확실한 무기입니다. 전력 극대화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바로 장관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군의 미래는 김훈 중위, 허원근 일병 사건처럼 잘 알려진, 그러나 군 당국의 결론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건들을 어떻게 푸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일마저 다음 정권으로 넘길 수는 없습니다. 곧 김 중위 19주기입니다. 벌써 19년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2092052015&code=990100#csidx9a207f2084d780388b455c92eb541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