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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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조차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면 (경향신문, 2019.04.18)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4-22 09:54
조회
148

사진출처 - 경향신문


여러 운동이 있었지만 독립운동은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헌신과 희생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그 말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또는 인권운동과 달리 어디든 기댈 구석조차 없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연일 승승장구하던 제국주의 일본과의 싸움은 승산 없어 보였고 독립은 몽상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풍찬노숙도 끝없이 반복했다. 조선 최고의 갑부였지만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떠나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이회영의 형 건영은 상하이에서 굶어죽었다. 당장의 불행은 물론 자식들의 미래까지 불행해질 게 뻔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이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한 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지고 실용주의가 어떤 이념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하는 요즘의 우리에게는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일제에 빌붙은 족속들이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호의호식을 이어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헌법 제121조의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훼손해도 흔한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일은 없는 세상이다. 원칙도 염치도 인간의 품위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세상이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 독립유공자를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분들 덕에 해방도 건국도 가능했다. 대한민국이 이룬 모든 성취의 근원에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방식은 너무 편협하고 옹졸했다. 제일 먼저 이념의 잣대로 갈랐다. 사회주의 계열은 유공자로 모실 수 없다는 거다. 독립의 공을 어떤 실천을 했는가를 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이념의 색깔이 어땠는지 묻고 따지는 거다. 유치한 냉전적 아집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겨우 이 엉터리 기준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해방 전 사회주의 활동은 용인하겠다고 했다가, 지난해가 되어서야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극 검토하겠단다. 입장 변화는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은 경우만 검토대상이란다.


밀양 사람 김원봉. 일본 제국주의가 그에게 내건 현상금이 김구보다 많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탁월한 독립투사였다. 제국주의엔 치명적이었고, 우리 겨레엔 영웅이었다. 누구보다 치열한 독립투쟁을 했고 빛나는 공적이 있지만, 그는 문재인 정부의 보훈 정책에서도 배제되었다. 국가는 지금껏 그를 외면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독립에 공이 있는지 아닌지를 따져 공이 있다면 예우하는 게 독립유공자 지정의 핵심인데, 해방된 이후의 행적을 두고 독립운동의 공마저 평가하지 않겠다는 거다. 


북한정권과의 연계 여부가 독립유공자 지정의 기준이라는 것은 정당성도 없거니와 법률 근거도 없는 엉터리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기 위한 법률이다. 법률이 정한 기준은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이다. 다들 인정하듯, 김원봉은 해방의 그날까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인데, 독립유공자로 모시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핵심은 간단하다. 1945년 8·15를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면 그만이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마치 독립운동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았다. 열여덟 나이에 독립투쟁에 헌신하고자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며 의열단을 조직했다.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했다. 7년 동안 23차례의 공격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의 독립투쟁은 황푸무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 대한민국 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숨가쁠 만큼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김원봉의 항일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임정 요인으로 귀국한 다음에도 김원봉의 고군분투는 멈추지 않았다. 여운형과 뜻을 같이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애썼다.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북에 남았다. 김원봉은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뜻을 함께했던 여운형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등의 모욕을 당한 다음이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아버지는 유폐되었다 굶어죽었고, 네 명의 형제와 다섯 명의 사촌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자신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화민국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혐의였다.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남에서는 노덕술 따위에게 ‘빨갱이 두목’으로 몰렸고, 북에서는 자유진영과 내통한 국제간첩이 되었다. 남과 북 모두에 버림받았다.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김원봉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김원봉은 다시금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서훈 문제가 자유한국당 특유의 색깔론과 만나면서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마저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 공세가 안타깝지만,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제와 답은 간명하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에 공적이 있으면 법률과 절차에 따라 그 공적을 평가하면 된다.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주는 게 국가의 기본이다. 대한민국이 기본이 바로 선 국가였으면 좋겠다. 독립운동가조차 기억하지 않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경술국치와 같은 비극은 다시 없겠지만, 누군가에게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기대하려면, 지금 이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