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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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장발장, 김 군의 경우(평화신문, 2015. 3. 2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19
조회
389

우리 시대의 장발장, 김 군의 경우 - 오창익 루카(인권연대 사무국장) 


장발장은행이 문을 열자 전화가 빗발쳤다.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은 끝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우성이었다.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빌려주는데도 신청은 끝없이 이어졌다. 돈 없는 은행이라, 빗발치는 요청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대출 신청을 받으면, 보수적인 변호사와 법학자들이 제법 까다로운 심사를 한다. 성범죄는 물론, 음주운전도 안 된다. 상습범이나 파렴치한 범죄도 안 된다. 남의 것을 훔치는 절도죄도 대출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 군은 예외였다. 절도죄였는데도 만장일치로 대출을 결정했다. 평생 법을 다루며 살았던 심사위원들은 탄식했다. 


스무 살 김 군. 절도죄로 처벌을 받은 건 지난해, 열아홉 살 때였다. 주유소 회원 할인 쿠폰을 내려받는 방식으로 ‘돈’을 훔쳤다. 모두 네 번. 그러나 네 번의 범행으로 훔친 돈은 1만 6000원에 불과했다. 어쩌면 호기심 어린 장난일 수도 있지만, 김 군에겐 관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주유소 사장은 경찰을 불렀고, 김 군은 경찰-검찰-법원을 거쳐 절도죄로 벌금 7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저 꾸지람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도 내야 하는 처지라, 한꺼번에 70만 원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장발장은행은 김 군에게 70만 원을 빌려주기로 했다. 70만 원 때문에 스무 살 청년을 교도소에 보낼 수는 없었다. 김 군은 벌금을 냈고, 교도소에 가야 한다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급한 불을 껐다. 


범죄를 진압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건 사회 정의 때문이다. 잘못하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릇, 앞 뒤 정황도 함께 살펴야 한다. 절도범이어도, 김 군처럼 미성년자거나, 피해금액이 1만 6000원에 불과하고 전과도 없는 사람까지 죄다 처벌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전과자의 앞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요즘엔 기업은 물론, 소규모 자영업체들도 사람을 뽑으며 ‘범죄 경력 조회’를 받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학생인 김 군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취업은 쉽지 않을 거다. 절도 전과자를 뽑을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열아홉 살에 훔친 1만 6000원 어치 쿠폰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한두 번쯤 도둑질하기도 한다. 다만, 어른들에게 야단맞으며 도둑질이 나쁜 짓이란 걸 배우면서 크는 게 세상 이치다. 김 군에게도 몇 번의 기회는 있었을 거다. 주유소 사장은 어린 시절의 수박 서리를 떠올리며, 그저 따끔하게 혼내면 충분했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경찰을 불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상한 탓일까. 그래도 심했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전과 없는 미성년자에다 피해 금액이 몇 푼 안 되면 훈방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김 군을 처벌해야 한다고 검찰에 넘겨 버렸다. 검찰은 기계적으로 약식 명령을 청구하며 기소 절차를 마감했다. 


김 군 사건은 검사가 그날 처리했어야 할 수백 개 사건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불러서 조사라도 했다면, 죄질이 나쁘지 않아서 꼭 처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검찰에서 약식 명령 청구를 받은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김 군은 잔뜩 쌓여 있는 서류 속에 파묻혀 버렸다. 


주유소 사장의 요구대로 김 군은 형사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 검찰, 법원의 여과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주유소 사장은 1만 6000원을 잃었다. 국가는 벌금 70만 원을 얻기 위해 행정력을 낭비했고, 김 군은 인생을 저당 잡혔다. 이익을 본 쪽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을 살피지 않은 사회 정의는 이처럼 공허하다. 


겨우 벌금을 빌려 내기는 했지만, 김 군이 전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매해 100만 명의 시민이 별의별 죄목으로 전과자가 된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전과자를 양산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