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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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단체여 시민과 연대하라(경향신문, 2015. 2. 10)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17
조회
376

[세상읽기]운동단체여 시민과 연대하라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자본주의는 무섭다. 돈이 으뜸이라니 말부터 살풍경이다. 갑과 을을 가르는 것도 결국 돈이다. 돈이 없어 무릎 꿇는 광경은 자본주의에선 일상에 가깝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흉악범의 조롱에서 그치지 않는 현실이다. 돈이 많고 적음은 개인의 성실한 노력보다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돈이 으뜸이 되는 구조는 자체로 정의롭지 않다. 부의 불평등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그래서 우리의 역할을 깨닫게 한다. 


운동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조직적 노력이다. 교황의 말처럼 모든 악의 근원이 부의 불평등에 있다면, 운동은 부의 불평등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 특히 한국적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폐해는 극단적이며 숱한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를 깨기 위한 운동은 역사상 가장 침체되어 있다. 운동가들이 의기소침해 있는 것은 물론 영향력도 미미하고 재생산구조도 어긋나 있다. 기껏해야 운동을 정계나 관계에 진출하는 교두보로 생각하는 정치예비군들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거리의 지도자들은 목청을 높이지만, 분명한 의제를 만들고 상황을 돌파하기는커녕, 구태의연한 관성만 반복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운동이 자본주의 구조를 깨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운동을 집어삼키는, 거꾸로 된 전복도 흔하다.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의 행태는 그 일환일 뿐이다. 그는 론스타 대표에게 받은 돈이 해직에 따른 보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조위원장 출신에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라는 직함이 없었다면, 그런 ‘보상’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을 거다. 해고된 은행노동자 누구도 그런 보상은 받지 못했다. 그가 보상 이후에 ‘먹튀’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직 먹을 게 더 남아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그냥 범죄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천박한 타락이다. 


개인의 일탈에서 멈추지 않고 조직 전체가 돈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다. 정부 등이 주는 프로젝트는 활발한 활동을 위한 약이 되기도 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운동가들은 서류를 꿰맞추고, 운영비를 건지기 위해 갖가지 방안을 다 짜내야 한다. 한번 프로젝트 구조에 들어가면, 그 다음엔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운동을 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위해 운동을 하는 식이다. 물론 운동가도 먹고살아야 한다. 하지만 왜 무엇을 위해 먹고사는지가 늘 분명해야 운동가이고, 또 운동단체일 수 있다. 근사한 이름으로는 실용주의일지 모르지만, 다들 돈독이 올라 있다.


중요한 건 원칙이다. 모두들 돈에 포섭되어도 결코 돈에 포섭되지 않는 뭔가는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운동이다. 원칙을 부여잡고 힘센 돈이 모든 걸 규정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마저 돈의 포로가 되는 건 너무 아쉽다. 물론 운동가들만 탓할 수는 없다. 누구나 독신으로 수도자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커 가는데, 노후는커녕 당장의 살림조차 힘겨운 상황에서 혼자서만 버티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말자는 건, 낭만적 운동가요의 가사일 뿐, 아무런 안전판도 또 보상도 없는 운동판을 오로지 초심으로만 버티기는 힘들다.


답이 있을까? 장화식류의 운동단체 내 부패세력은 철저한 자정 노력을 통해 솎아 내면 된다. 단체가 그 일에 실패하면, 요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오지랖 넓은 검찰이나 경찰이 나설 테니, 큰 걱정은 없다. 어쩌면 더 큰 문제는 부패가 아니라 무기력이다. 그 무기력과 싸우려면, 싸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매달 회비를 내거나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과의 연대만이 그 답이다. 부지런히 회원가입을 권유하는 것, 그 뻔한 답이 유일한 답이다. 어렵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길이다. 시민들과 함께 모든 악의 근원인 부의 불평등을 깨뜨릴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힘의 근거를 만들자. 그게 바로 희망의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