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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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적, 검찰공화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7.11)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1:33
조회
544

민주주의의 적, 검찰공화국


지난 6월 내내 검찰은 분주했다. 또 어수선했다. 평검사 회의를 열고 대검의 검사장들은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검찰총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건 조폭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경찰을 비난하던 그들이었다. 검찰총장은 서울에서 세계검찰총장회의가 열리는 중이라 당장 그만두지 못한다며 아쉬워했다. 검찰총장 임기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아 진정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보통 일은 아니다.


검사들이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섹검’이니 ‘떡검’이니 하며 조롱당할 때도 이렇지 않았다. 직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험한 수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검사들의 반발은 경찰과의 이른바 ‘수사권 조정’ 때문이다. 이쯤에서 설명을 멈추면 보통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해묵은 숙제가 떠오를 것이다. 검찰이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고 경찰 수사에 대한 전권을 휘두르니 일정한 범위 안에서 수사권을 나눠달라는 게 경찰의 이를테면 숙원사업이었다. 그렇지만 6월 국회의 쟁점은 수사권 ‘조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검사의 권한은 강화됐다. 검사의 지휘 범위를 ‘모든 수사’로 명문화해 검사의 지휘를 오히려 강화했다. 다만 검사의 지휘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로 한 게 형사소송법 개정안의 골자다. 검찰은 법무부령을 고집했다. 어떻든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법무부령으로 하면 검찰의 입맛대로 정할 수 있지만, 대통령령으로 하면 경찰청이 소속된 행정안전부와 협의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싫다는 거다. 협의하려면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경찰관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검사 지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협의해야 하는데, 그 자체를 상상하기 싫다는 거다. 명령-복종 관계가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느냐는 거다.


수사권 조정 반발은 할리우드 액션


검찰은 엉뚱하게도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원칙을 들먹이며 국회가 형사소송법에 손대면 안 된다고도 했다. 이미 행정부에서 법무부령으로 합의했는데, 국회가 행정부의 합의를 훼손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삼권분립의 원칙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통해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자는 원칙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횡포와 전횡을 오랫동안 경험한 인류가 고안해낸 안전장치다. 검찰의 주장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이 맘대로 정하고 고칠 수도 있는 법무부령으로 정해야 행정부의 부당한 관여를 막을 수 있다는 거다. 그래야 권력으로부터 사법을 분리하는 삼권분립 원칙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거다. 방금 쓴 이 문장을 이해할  시민이 있을까? 법무부 장관은 엄연히 행정부 소속 공무원이고, 검찰청 소속 검사도 모두 행정부 소속 공무원인데?


행정부 소속 공무원인 검사가 삼권분립 운운하는 것은 자신들이 사법부와 동일한 위상을 지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검사는 국민의 인권을 다루는 중요한 책무- 사실상 사법 업무- 를 다루고 있기에 사법부 같은 고도의 독립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검사는 검찰청을 사법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준사법기관’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예 사법기관으로 격상시켰다. 그래서 사법기관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어떻게 입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느냐고 흥분하는 것이다.


검찰이 사법기관이고 검사는 사법관(판사)과 동일하다는 인식은 헌법과 법률 어디를 봐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검사들만의 오만불손한 주장일 뿐이다. 이 주장에 근거가 있다면, 검사가 판사와 똑같이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그들과 똑같은 ‘사법’연수원을 나왔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검사는 “어떻게 국회의원 몇 명이 앉아서 법률을 고칠 수 있느냐”고 호기 있게 말한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지만, 막상 검찰 개혁은 조금의 진전도 없다. 경찰과의 수사권이 조정되지도 않았고, 검찰권을 견제하는 어떤 진전도 없었다.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가 1년4개월 동안 활동했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국회 사개특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서 불거진 검찰 개혁에 대한 시민적 여망을 제도적 개혁으로 연결하기 위한 국회 차원의 노력이었다. 모처럼 개혁 대상이나 이해당사자가 아닌, 의회 차원의 논의여서 주목해볼 만했다. 애초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한때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대검 중수부) 폐지, 특별수사청 신설 등을 여야 합의로 추진했다. 하지만 검찰의 반발은 강력했다. 검찰은 국회를 직접적으로 압박했다. 검찰이 사개특위 위원장의 계좌를 뒤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도 검찰 편을 들었다. 결국 검찰은 모든 논의를 백지화해버렸다. 검찰의 완승이었다. 여야 합의를 좌초시킬 만큼 검찰의 힘은 막강했다. 그런데도 검찰총장과 검사장들은 사표를 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대단한 힘이고 배짱이다.


무소불위가 된 행정부 공무원


검찰의 엄청난 힘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때 검찰권 행사의 정점에 서 있기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성이다.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었다.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지역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개탄스러웠다.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었다. 나라가 검찰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다.”(1)


따가운 비난이지만, 결국은 검찰의 힘이 막강하다는 이야기다. 그랬다. 과거 경찰, 군대,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 비밀정보기관에 밀려 뒤치다꺼리나 했던 검찰이 이제 나라를 ‘검찰공화국’으로 바꿔버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었다. 검찰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지금까지의 모든 검찰 개혁 움직임을 분쇄해버렸다. 검찰의 힘은 이미 사법부와 입법부를 능가하고 대통령과 거의 맞먹는 수준으로 커져버렸다. 힘은 크지만 적절한 견제나 통제는 없다.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검찰은 수사와 기소에 대한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검찰의 한자어(檢察)는 ‘잡도리하고 살핀다’는 뜻으로 검찰 수사를 강조하고 있고, 영어(Prosecution)는 ‘기소’라는 뜻을 담고 있다. 법의 지배가 실현되는, 어떤 갈등이 생기면 사회적·정치적 조정 과정보다는 곧바로 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한 법만능사회에서 수사와 기소는 그야말로 막강한 권한이다.


검찰은 누군가에게 죄가 있어도 수사하지 않거나, 수사하고도 기소하지 않을 수 있다. 거꾸로 죄가 없는 게 뻔해도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다. 검찰이 갖고 있는 수사와 기소에 대한 배타적 권한 때문이다. 잘못된 수사나 기소를 해도 책임지는 일이 없다. 개인도 조직도 어떤 책임을 지지 않는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서는 검찰권의 오남용 정도가 심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문화방송 <pd수첩>, 한국방송 정연주 사장 등 숱한 사건이 쏟아졌다. 그동안 실제 적용 사례가 거의 없던 전기통신기본법의 조문을 활용해 미네르바를 수사하고 구속 기소한 검찰은 법원의 무죄 선고와 관련 법률의 위헌 결정으로 완패했다. 미네르바는 자유를 찾았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는 비난받았다. 그러나 검찰의 완패, 곧 미네르바의 승리는 그저 허울뿐이었다. 실제로 승리한 것은 검찰이다. 이명박 정권의 필요에 따라 수사에 나선 검찰은 ‘인터넷 공간에 의견을 쓰는 것도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교훈을 확실하게 남겼다. 미네르바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몸무게가 40kg이 빠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상처뿐인 영광’에도 미치지 못하는 완패였다. 미네르바 사건 담당 검사들은 모두 영전했다. 한 사람을 파괴한 것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도 마찬가지다. 법원의 조정에 응한 것이 배임이라고 수사와 기소를 단행한 검찰은 역시 법정에서는 패배했지만, 그를 한국방송 사장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정연주 사건을 맡은 검사들도 모두 승진했다.


없는 죄 만들고 있는 죄는 덮고


수사와 기소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잘못된 수사와 기소를 당하면 헤어날 길이 거의  없다. 개인은 피폐해지고 패가망신을 당한다. 나중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도, 수사와 기소가 진행되는 동안 받은 피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 국가에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지만, 이때 보상액은 하루 ‘최저임금액’ 수준이다. 적게 받으면 올해 기준으로 3만3880원이고,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하루 16만원이다. 억울한 옥살이가 이깟 금액으로 보상될 수는 없다.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은 아무리 부패와 비리가 만연해도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적어도 임기 말까지는. 혐의가 차고 넘치고,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피해자가 쏟아져나와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시민사회단체의 고발이 쏟아져도 마찬가지다. 수사하지 않는 것도, 수사해도 기소하지 않는 것도 오로지 검찰의 권한이기에, 피해자들이 달리 해볼 도리가 없다.


참여정부 때 형사소송법이 개정돼, 고소 사건에 대해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법원의 판단을 구해보는 재정신청 제도 범위가 모든 고소 사건으로 확대됐다.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렇지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법원의 개입이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통제하는 안전장치가 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재정신청 사건의 경우에도 검찰이 공소 유지를 하기에, 막상 재판이 열리더라도 검찰이 구형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법원의 결정을 무력화할 수 있다.


법원의 결정을 검찰이 무력화하는 것은 재정신청 사건만이 아니다. 수사와 기소라는 진입장벽을 넘어 재판이 열려도 검사가 공소 취소를 하면 당장이라도 재판이 중단된다. 재판이 확정될 때까지 공소를 유지해도 법원의 판결을 무력화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피고인에게 중형이 선고돼도 검찰은 형집행정지를 통해 피고인을 석방시킬 수 있다. 재벌 회장 등이 이런 방법을 통해 죗값을 치르지 않고 석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형사사법은 실상 ‘검찰사법’이라 불리는 게 더 적당하다.


마지막 개혁 수단은 시민의 손에


애초 검찰제도는 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출현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전의 재판은 모두 원님 재판이었다. 고을 사또가 수사도 기소도 재판도 다 했다. 수사한 사람이 재판까지 하니, 일단 수사가 시작되면 곧바로 유죄판결로 이어졌다. 피해자가 속출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기껏해야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정도의 호통이나,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는 말밖엔 없었다. 그래서 만든 안전장치가 소추기관과 재판기관을 분리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지금은 문명국가의 상식이 되었다. 분리와 견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대혁명의 선조 정신은 당연히 지금도 유효하다.


검찰은 견제를 위해 출현했지만, 한국 검찰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어떤 나라의 검찰도 갖지 못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고 있다. 그래서 검찰 개혁의 핵심은 검찰이 가진 권한을 쪼개는 데 있다. 소추와 재판을 나눈 것처럼, 수사와 기소를 엄격히 다른 기관으로 분리하는 것에서 검찰 개혁은 시작된다. 검찰청은 기소와 공소유지라는 본연의 임무만 수행하고, 수사는 온전히 경찰이 맡으면 된다. 수사하고 싶은 검사가 있다면, 경찰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검찰 개혁은 절실한 과제다. 그러나 정치권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확인됐다. 직전 대통령 서거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단 하나의 방법이 남았다. 시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 시민이 정치인에게 검찰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검찰 개혁이 중요한 공약이 될 수 있도록 정치권을 압박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야 바꿀 수 있다.


글·오창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