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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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힘이 세다"(경향신문 칼럼, 2015년 9월 26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40
조회
502

[세상읽기]말은 힘이 세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남강 이승훈. 변절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고,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에는 여준, 조만식, 염상섭, 김억, 홍명희, 주기용, 함석헌 등의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그저 제 한 몸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애썼던 평범한 장사꾼이었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됐으니 당장 먹고사는 게 급했다. 일을 해야 끼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 처지였다. 사환으로 시작해서, 보부상으로 일하며 전국을 누볐다. 보부상으로 번 돈으로 유기공장을 차렸고, 무역과 운수사업까지 일으켰다. 그는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했지만, 나라의 운명은 기울었다.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자, 갑자기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실의에 찬 나날, 은인자중의 시절이었다.  
43세가 되던 1907년, 이승훈은 놀랍게 변한다. 마치 예수가 사생활을 접고 공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단박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계기는 단 하나, 그해 7월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었던 것이다.한 번의 연설로 이승훈은 모든 걸 바꾼다. 금연, 금주에다 단발을 하고,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에도 가입한다. 곧바로 전 재산을 바쳐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교육, 문화, 출판, 그리고 비밀결사운동에까지 맹렬하게 나선 것이다. 모든 존재를 걸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바꿔 공적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이승훈의 마음을 움직인 안창호는 당시 29세였다.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 문화, 습관을 바꾸고,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곧바로 실행했던 것이다. 남강 이승훈의 극적인 변모는 말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준다. 말은 우리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우리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책 제목처럼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말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기도 하다. 천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 하지만, 요즘처럼 말이 힘을 잃은 시절도 없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접하는 말은 많아졌지만, 말이 사람을 바꾸거나 세상을 바꾸는 일은 흔하지 않다. 
당장 대통령부터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그 말에 힘을 얻거나 그 말에 기대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청년 일자리 13만개가 만들어진다는 대통령의 말에 희망을 거는 젊은이가 있을까. ‘노동개혁’을 하면 능력으로 인정받으며, 정규직 취직이 쉬워지며,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없는 일터가 만들어진다는 정부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을까. 그저 각자도생의 삶이 있을 뿐이다.
방송사의 토론은 여전하지만,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싱거운 소리만 반복한다. 이성의 힘을 믿고 공론을 펴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저 이기거나 지는 유치한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명예훼손과 모욕죄를 무기로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 경우도 너무 많다. 표현의 자유는 잔뜩 위축되고, 권력과 자본이 통제하는 언론은 무기력해졌다. 말이 힘을 잃은 것은 그저 정치적 유불리만 셈하며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해대는 능력이 발달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어느새 말의 힘을 잊은 탓도 있을 거다. 말 한마디 때문에 설레기도 하고, 말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도 하던 우리가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까.
마침 명절이다. 모처럼 가족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올라온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추석상에 올라갈 만한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다. 추석 민심을 끌어오기 위한 노력일 게다.그렇지만 이번엔 정치하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이야기 말고, 우리가 준비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정부가 요구하는 노동개혁의 실과 허에 대해서, ‘청년희망펀드’가 청년 실업사태를 극복할 방도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국회의원 정수 조정 문제나 정치개혁 문제, 내년 총선에 꼭 포함되어야 할 공약이나 우리가 키워줄 만한 좋은 정치인 이야기도 추석상에 올려보자. 정치가 그저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정치인들만의 문제일 때, 우리는 정치에서 점점 소외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재단되거나 처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자. 지금껏 내 일처럼 여기지 않았을지 모를 숱한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답을 찾아보자. 국민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민심이 무섭게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핵심에 바로 국민의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