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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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반성문, 4·16 특별법 (평화신문 1276호/ 2014.8.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6:31
조회
409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지옥의 한 철을 보낸 사내. 하지만 스물 몇 해 전의 일이다. 나이 오십이 넘었고 사업을 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이젠 예전의 상처는 다 아문 것처럼 보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폐쇄되었고 경찰청 남영동 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선배 김근태를 추모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5층 조사실 복도에 서자, 갑자기 몸이 떨렸다. 어깨는 흔들렸고 호흡이 가빠졌다. 말문은 닫혔고 그저 눈물만 흘렀다.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스물 몇 해 전의 고문을 기억하고 있던 것은 사내의 몸이었다. 고통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보다. 몸에 저장된 기억은 어김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고통을 제대로 잘 기억하는 게 사람의 정해진 몫인지도 모르겠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백 일이 훌쩍 지났다. 가족들은 백 년 같은 시간이었단다. 참혹한 고통의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 한 명도 구출하지 못한 무능과 무책임을 지켜봐야 했다. ‘에어 포켓’ 어쩌고 하는 희망 고문도 당했다. 책임 피할 궁리만 할 뿐,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분통 터지는 시간이었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했다. 가족을 잃은 고통 말고도 숱한 새로운 고통이 몸에 새겨졌다.


 가족들은 잊는 것 대신, 기억하기를 선택했다. 잊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기억하는 일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족들의 뜻은 새로운 법률의 제정으로 모아졌다. 바로 ‘4·16 참사 진실 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4·16 특별법)이다. 4·16 참사 원인과 책임 소재를 밝히고 희생자를 위로, 기억하자는 거다. 피해자를 돕고 재난 방지 대책을 수립해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게 이 법의 목적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4·16 특별법’이 정국의 최대 현안이 되었다. 정부·여당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에게는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없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치부하거나, ‘4ㆍ16 특별법’에 들어 있지도 않은 대학 특례입학이나 의사자 지정을 핑계로 법안 통과를 막고 있다. 핑계가 부족하니 예산 타령도 해댄다. 유족들은 여당의 횡포에 맞서 단식까지 하고 있다. 비참은 이렇게 반복되고 지속되고 있다.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 끔찍한 고통을 또 겪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직하게 그리고 제대로 기억하는 것뿐이다. 그래야 300여 명의 희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4·16 특별법’ 제정은 우리 모두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종의 보속이다. 국가적 반성문이기도 하다.


 가톨릭은 기억의 종교다. 그리스도인은 매일처럼, 주님의 말씀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미사는 그래서 기억의 향연이다. 당장의 고통은 아프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으로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되는 부활 신앙을 체험할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인권의 성경이라 불리는 세계인권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기억이 낳은 인류의 보배로운 자산이다.


 최근 수원교구의 이용훈 주교와 제주교구의 강우일 주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단식 농성장을 찾았다.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유족들에게 힘을 보탰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의장의 소임을 맡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된다. 1993년 서해페리호 사건은 1994년 성수대교와 1995년의 삼풍백화점 참사로 이어졌다. 종국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였다. 서해페리호 사건에서 교훈을 얻고, 제대로 기억했다면, 나라가 거덜 나는 사태는 겪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답은 명백하다. 지금 당장 ‘4·16 특별법’을 만드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