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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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근로 (경향신문, 2016.3.16)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41
조회
672

지역자활센터에서 강의를 요청했다. 자활근로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인권교육을 해달라는 거다. 좋은 취지다. 인권교육은 인권 당사자나 피해자에게 더욱 절실하다. 비장애인보다 장애인, 남성보다 여성,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 국민보다는 비국민에게 더 필요하다. 처음 해보는 일도 아니었다. 그 센터에서만 벌써 몇 년째 했던 일이다.


그런데 강의는 순조롭지 않았다. 첫머리부터 한 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인권 같은 걸 배워 어디다 써먹느냐고 했다. 있을 수 있는 투정쯤으로 여기고 넘기려 했는데, 그 분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해부터 자활근로 참여자들의 수급비가 엄청 깎였다고 했다. 대개 매월 20만원씩 줄었단다.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나섰는데 오히려 손해를 봤단다. 일을 하는 게 가만히 앉아서 수급비를 받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거다. 먹고사는 게 급하고 당장 수입이 줄었는데 무슨 인권 타령이냐고 했다. 물론 이런 푸념은 인권에 대한 오래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바로 핵심적 인권문제지만, 척박한 한국적 현실 때문에 인권은 여전히 고문, 도청, 간첩 조작 같은 국가범죄에서 멈춰있다.


시장도 아니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더더욱 아닌 내가 들어야 할 꾸지람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끊이지 않았다. 도무지 강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마무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칠판에 e메일 주소를 적고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보내달라고 했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가능하면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분들에게도 알리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e메일 주소를 받아 적거나 스마트폰으로 찍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누구도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갑자기 귀찮아진 걸까. 아니면 메일을 보내도 소용없다고 여겼을까. 가난한 사람들의 체념은 이렇게 빠른 걸까. 높은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든 까닭이 뭘까. 의문은 그 다음 강의 때 풀렸다. 쉬는 시간에 몇 분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강의 때야 목소리를 높여도 누군지 알 수 없으니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메일은 누군지 드러나기 때문에 망설였다고 했다. 자신을 드러내며 불만을 말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는 거다. 을의 처지가 다 그렇다고 했다. 인권운동가조차 믿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개 사람이 놓인 처지가 그 사람의 언동을 규정하는 법이 아닌가.


자활근로는 일이 없어 생계가 어려운 기초생활 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에게 그나마 숨통 같은 역할을 한다. 근로 기회를 제공해 자활기반을 마련해주자는 취지다. 그렇지만 자활근로도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라 녹록지 않다. 출결을 정확히 따지고 성실하게 일하는지도 꼼꼼하게 점검한다. 술을 먹으면 당장 쫓겨난다. 당연한 관리다. 하지만 권력(power)은 관리를 하는 쪽에서 관리를 당하는 쪽으로 행사되기 마련이다. 간단하게 갑-을 관계가 만들어진다. ‘근로의 권리’(헌법 제32조)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헌법 제34조) 보장을 위한 제도조차 갑-을 관계와 만나면, 권리(right)를 가진 사람을 위축시키기 마련이다. 때론 권리의 보장이 구시대적 시혜에서 멈추기도 한다.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은 일대 혁신이었다. 인식의 체계, 철학적 기조가 단박에 바뀌었다. 이전의 ‘생활보호법’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 시혜 차원이었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바탕으로 한다. 놀라운 변모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부합하는 진전이었다.


자활근로도 말 그대로 근로지만, 노동자의 기본권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최저임금도 보장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다. 어떤 권리를 보장한다면서, 다른 권리들은 가볍게 지나친다. 인권에는 예외가 없어야 한다. 단 하나의 예외만 있어도 그건 그냥 인권침해일 뿐이다. 다른 모든 권리가 잘 보장되어도,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또는 사회보장이 없는 세상은 그저 인권침해가 자행되는 지옥일 뿐이다.


자활근로에 참여하는 노동자이며 시민인 사람들의 노동기본권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자활근로를 진행하는 국가와 참여 기관들이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그저 시혜의 대상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소득이 적다고 깔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활근로에도 노동기본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이 교과서적, 곧 헌법적 요구는 어쩌면 한국적 상황에서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경제 때문에 빈곤층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기초생활 수급자는 거꾸로 줄어들고 있다. 자활근로 예산도 부쩍 줄어들었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만 쳐도 기초생활 수급자 15%, 의료급여 대상자 19%, 아동복지 대상자가 15% 줄었다. 자활지원 대상자는 37% 줄었다.


곧 총선이다. 선거는 변화를 위한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그동안의 적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희망을 여는 한판의 푸닥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모든 걸 한꺼번에 바꾸지는 못한다 쳐도, 다만 하나라도 진전을 이뤄야 한다.


하지만 이번 총선은 그저 대선 전초전에만 머물러 있다. 파당마다 미운 사람 솎아 내고 자기 사람 심는 데 골몰하고 있다. 공약을 내걸고 유권자의 심판을 기다린다지만, 더 좋은 공약이 총선 승리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꼭 가난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다. 열심히 일하면 부자는 될 수 없어도, 적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있을 거란 기대조차 무참히 외면당하고 있다.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면서도 유권자의 처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저들을 심판할 방도도 딱히 없어 보인다. 지역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지켜줄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유권자의 기본을 확인하는 게 유일한 답이지만, 그 기본이 어쩌면 한국 정치에서는 가장 힘든 난제이기도 하다.


황사도 별로 없다는데, 이 봄의 하늘은 그저 뿌옇다. 미세먼지 때문인가.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