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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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과 백남기"(경향신문 칼럼, 2015. 12. 1)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43
조회
413

[세상읽기]이한열과 백남기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1987년 6월9일. 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머리에 맞았다.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경찰은 최루탄 발사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학생들을 겨냥해 직격탄을 쐈고, 학생들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 최루탄이 이한열을 쓰러트렸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었지만, 검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수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최루탄을 발사한 사람을 특정하기 어려울 거란 말을 언론에 흘렸다. 경찰 책임자에 대해서도 행정상 책임은 몰라도, 직무유기죄를 적용하는 건 힘들 거라 했다. 수사는 검찰의 말처럼 진행되었다. 맞은 사람은 있는데, 쏜 사람은 없었고, 이한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경찰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형사적 책임 대신 행정상 책임을 물었던 것도 아니다. 현장 책임자였던 서대문경찰서장 김수길은 이한열이 사경을 헤매는 동안 어떤 문책도 받지 않았다. 이한열이 목숨을 잃자 직위해제를 당했지만, 직위해제는 징계도 뭣도 아니다. 그저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한 꼼수였을 뿐이다. 그나마 석 달 만에 복직했고,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았다. 그뿐인가, 다음해 6월에는 경무관으로 승진까지 했다. 


이한열의 장례식에 건국 이래 최대 인파가 모였지만, 이한열 죽음의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은 없었다. 겨우 국가의 민사상 책임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였을 게다. 이한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최루탄이 사라진 건 12년이나 지난 1999년의 일이다.


농민 백남기는 물대포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 2015년 11월14일, 달포 남짓이면 칠십이 되는 노인이다. 경찰은 이번에도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물대포는 시위 군중 해산을 위한 장비인데도, 그저 한 사람의 개인을 향해 무자비하게 쐈다. 역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군부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수사하는 시늉이라도 냈던 당시 검찰과 달리, ‘검찰공화국’의 위업을 달성한 2015년의 검찰은 시늉조차 내지 않고 있다. 직위해제라는 꼼수라도 보여줬던 경찰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에 의한 경찰 폭력의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민을 폭도로 규정하고, 과감한 선제공격을 일삼는 태도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대통령은 시민들을 이슬람국가(IS)에 빗대기도 했다. 온 국민이 범죄를 목격했지만, 범죄를 진압하고 범죄자에게 죄를 묻는 국가작용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87년과 2015년이 다른 점은, 그래도 전두환 시절에는 민심이나 여론 동향을 파악하려는 자세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실종되어 버렸다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28년의 긴 세월을 지내놓고도,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때보다 더 후퇴한 시절을 살고 있는 거다. 모든 면에서 꽉 막혀 버린, 그래서 박근혜 정권은 마침내 전두환 정권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기에 앞서,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동안 도대체 뭘 어떻게 잘못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하는 참담한 자괴감을 느낀다.


이한열과 백남기. 두 사람 모두 경찰 폭력으로 쓰러졌지만, 죄질로만 본다면, 백남기의 경우가 훨씬 나쁘다. 이한열은 단 한 번의 발사로 그렇게 되었지만, 백남기의 경우는 적어도 20초 이상 지속적으로 발사했다. 직사포로 사람을 쓰러트렸음에도 쓰러진 사람을 계속 쐈고, 그를 구호하려는 사람과 심지어 구급차까지 따라붙으며 정확한 조준발사를 했다. 


전두환보다 못한 박근혜도 문제지만, 반복되는 악순환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 모두 움직이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돌아와야 한다. 충분히 예견되었음에도 ‘독재자의 딸’을 국가지도자로 선택한 우리의 책임이 크고, 지금의 참담한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