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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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최후진술, 산 사람의 책무(경향신문, 2015.4.14)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25
조회
364

목숨 건 최후 진술, 산 사람의 책무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마지막 순간. 꼭 기사화해 달라며 신신당부하던 심정은 어땠을까. 구명 요청을 거절한 여권 실세들에 대한 분노로 몸서리치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불행한 기업인은 또 없어야 한다는 심정이었을까.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인터뷰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지만, 그렇다고 격정적인 토로는 아니었다. 앞뒤는 정확했고 차분했다. 이 인터뷰를 끝으로 기업인이며 정치인이던 성완종씨는 생을 달리했다.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된 날이었다. 비극이다.


누구도 원망 말라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성완종씨는 돈을 건네준 정권의 실세들을 일일이 거명했다. 원망 때문인지, ‘깨끗한 세상’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일생과 목숨을 걸고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1987년 이후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캠프의 정치인들은 매번 불법자금을 끌어들였다. 지난 대선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게 돈을 준 사람의 고백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건 형벌 따위를 피하기 위한 술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한 최후의 진술이다. 특별히 신뢰할 만한 진술이다. 해서 우리에겐 죽은 사람이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할 책무가 생겼다. 산 사람들에겐 언제나 죽은 사람의 마지막 말을 경청해야 할 책무가 있다. 


지난주 경향신문 보도 이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주요 인사들의 반응도 당연한 일이다. 풍성한 말이 쏟아졌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그리고 김진태 검찰총장이 말을 꺼냈다. 다들 ‘한 점 의혹 없이’ ‘성역 없이’ ‘엄정 대처’하며 ‘철저한 수사’를 하란다.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수사에 나섰다. 수사팀은 검찰의 명예를 걸겠단다. 벌써 오랫동안 정권의 청부수사나 하며 이미 금치산자 수준으로 만신창이가 된 검찰에 아직도 명예가 남았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지켜볼 일이다.


대통령, 여당 대표, 검찰총장이 똑같이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하는 건 뜬금없는 일이다. 수사는 언제나 엄정해야 하고, 예외 없이 법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단서가 있으면 수사를 해야 하고, 수사의 대상이 고관대작인지, 대통령 주변의 실세인지도 따지지 않아야 한다. 해서 대통령을 비롯한 높은 분들의 지당한 말씀은 오히려 공허하다. 왜 이렇게 당연한 말씀을 새삼 강조하는 걸까.


이런 말을 자신의 부패마저 과감하게 도려내겠다는 고해성사적 성찰이나,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요란한 말잔치를 펼치는 건, 거꾸로 검찰 수사로는 결코 속시원한 결론에 이를 수 없다는 걸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에게 제대로 칼을 겨눈 적은 없었다. 간혹 대통령의 가족들을 구속한 사례가 있지만, 그건 임기가 다 끝나가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는 2년10개월이나 남았다.


우리의 경험칙은 ‘성완종 게이트’가 박근혜 대선캠프 불법자금 수사로 이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저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로 끝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검찰이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과 어쩌면 대통령 자신을 겨냥할지도 모르는데, 한 점 의혹도 없는 철저한 수사를 하지는 않을 거다. 유서에 적힌 몇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화들짝 놀라, 숨기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을 게다. 


그렇게 우리는 늘 그렇고 그런 나라의 수준을 맴돌게 될 거다. 대통령 임기가 절반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을 겨눈 수사는 없었다. 하지만 여태껏 없었다는 게, 앞으로도 없을 거란 근거는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면, 너무 순진한 기대일까. 아무튼 이제 검찰의 수사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