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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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은행(경향신문, 2015. 3. 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18
조회
365

‘장발장은행’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문제는 심각했고 답도 다 나와 있는데, 정부와 국회는 짐짓 모른 척 일관했다. 매해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4만명이 넘는다. 2009년엔 4만3199명이었다. 법과 제도의 잘못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지금은 한 달 내에 목돈을, 그것도 현찰로 내야 하지만, 분할 납부나 카드 납부만 허용해도 억울한 수감자는 상당히 줄일 수 있다.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처럼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 벌금을 달리 내면 공평해질 수 있다. 교도소에 가두지 말고 사회에서 노역활동을 해도 된다. 답은 쉬운데, 고칠 생각은 전혀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의 노력 끝에 국회의원 33명의 서명을 받아 개정 법률안을 냈지만, 법률안은 늘 계류 중이다. 


그렇다고 소득불평등이 곧바로 형벌불평등으로 이어지는 당장의 고통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불과 일이백만원 때문에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죄질이 나빠서나 위험해서가 아니라, 그저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이다. 국가가 버린 가난한 사람들은 패배감에 몸서리쳤지만, 무기력하기만 했다. 가난하면 몸은 물론 입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주 수요일, 강우일 주교와 박경서, 서해성, 이만열, 홍세화 선생 등을 모시고 ‘장발장은행’을 만들었다. 은행이지만, 돈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시민의 성금에 기댈 뿐이지만, 포부는 컸다.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야 할 분들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다. 담보는 없고, 무이자에 6개월 거치, 1년 균등상환이 조건이다. 궁여지책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돈은 교도소 담장 안팎을 가르고 때론 생사여탈도 관장한다. 고약한 현실이다. 우리는 늘 그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발장은행은 다르다. 돈이 사람을 구하고, 돈이 자유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원래 이런 역할은 국가의 고전적인 의무였다. 지금 한국에서 그런 국가의 역할을 기대하긴 어렵다. 경제가 불쌍하다는 대통령도 매해 4만명이나 되는 진짜 불쌍한 사람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벌금형도 형사처벌이지만, 그들이 저질렀다는 범죄도 기껏해야 기초질서 위반 수준의 가벼운 범죄들이다. 도로교통법 위반 사범이 제일 많다. 그동안 진보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서툴렀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상대방의 실수에 기대 목소리만 높이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실사구시형 진보, 비참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을 감싸는 따뜻한 진보가 필요하다. 


장발장은행은 돈 없는 은행이다. 시민들이 후원해준 만큼 은행 노릇을 할 수 있다. 후원금이 모이면 곧바로 대출을 한다.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 이후 이틀 만에 2000만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고,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대출을 시작한다. 장발장은행은 문턱은 없지만, 장발장들만 돈을 빌릴 수 있다. 장발장은행의 모토는 ‘자유’다. 시민 참여로 모인 성금은 오로지 자유를 위해서만 쓴다. 


장발장은행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약자에게만 한없이 강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군림하는 국가, 엄한 얼굴로 기초질서 확립을 외치는 차가움에서 벗어나 사회적 모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 것이다. 가난이 곧 형벌을 뜻하는 냉혹한 세상이지만, 장발장은행은 돈이 자유를 앗아가는 세상을 한 뼘이라도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장발장은행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이웃의 자유를 구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교도소 노역수의 하루 일당은 5만원이다. 5만원이면 24시간의 구금과 바꿀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으면, 이틀, 사흘, 나흘로 늘어날 수도 있다. 선의의 시민들의 참여를 바란다. 하나은행 388-910009-23604(장발장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