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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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주일학교(평화신문, 2015. 2. 8)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15
조회
394

[시사진단] 세상 보는 눈을 키우는 주일학교


- 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  2015. 02. 08발행 [1301호] 


왜 인권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대단한 포부는 없고,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답변은 늘 궁색하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되물으면, 늘 주일학교가 떠오른다. 주일학교에 다닌 건 부모님의 선물이었고 행운이었다. 주일학교는 내 생각이 만들어진 곳이다. 


생각이나 관점은 만들어진다. 생각이나 관점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내가 다닌 학교들은 국가의 관점으로 보고 생각하도록 반복 훈련을 시켰다. 누구나 예외 없이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여기게 했다. 국가의 발전이 곧 개인의 발전이며,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으로 배웠다. 차렷! 앞에 나란히! 좌우로 정렬! 군대에서나 가능했을 제식훈련을 받는 게 교육의 시작이었다. 학생 지도도 군대식 구타로 일관했다. 오로지 성적만으로 수십만 명을 한 줄로 세우는 학교에선 숨 쉴 곳이 별로 없었다. 


주일학교는 달랐다. 구타는 물론,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교사도 없었다. 교사들은 헌신적이었다. 교육도 학교보다 세련되었다. 가난한 시절인데도 슬라이드와 영화 등 다양한 기자재를 이용한 수업을 했다. 캠프나 피정 같은 숙박 교육도 자주 했다. 주일학교 교재는 학교 교과서보다 내용은 물론, 디자인과 종이 재질까지 좋았다. 육성회비 몇백 원을 내지 않았다고 도둑 취급하던 학교와 달리, 필요한 경비는 저렴했고 그나마 내지 못하면 본당에서 어떻게든 해결해주었다. 무엇보다 학교와는 다른 가치를 가르쳤다. 나와 이웃을 사랑해야 할 까닭을 알려주었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도 알려주었다. 만약 학교만 다녔고, 그래서 비교 대상을 알지 못했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거다. 주일학교가 그저 잔혹한 현실의 도피처였다는 게 아니다. ‘생각하는 삶’이 뭔지에 대해 일깨워 준, 진짜 학교였다. 


지금 주일학교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곧 말라죽을 지경이다. 교회에는 노인들만 넘쳐난다. 주일학교가 어린이, 특히 청소년들에게 외면당한 지 오래되었다. 이유가 뭘까? 입시지옥과 사교육 열풍, 스마트폰 환경, 부모 세대의 냉담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주일학교가 예전 같은 매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게다. 남 탓보다는 내 탓이 훨씬 크다. 


교리교사는 부족하고 자주 바뀐다. 20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헌신에만 기대니, 뭐 하나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사제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그나마 금세 바뀐다. 무엇보다 아픈 건 제대로 배울 게 없다는 인식이다. 주일학교에서 확실히 배우고 체험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속무무책으로 주일학교 붕괴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게다. 교회의 관심도 적다. 관심의 크기는 예산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교구나 본당의 주일학교 예산은 여전히 5% 미만에 머물고 있다. 


속절없이 사교육 따위에 밀릴 수는 없다. 교회의 내일도 걱정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청소년들을 반교육적 환경에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오로지 돈만 좇는 세상과 달리, 사람이 왜 귀한 존재인지, 왜 자매애의 정신으로 서로 협력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체험시킬 책무를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 


먼저, 교리교사부터 확충하자. 당장 교적부만 들춰봐도, 교리교사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숱하게 많다. 교사나 대학교수, 석ㆍ박사 출신의 역할도 찾아보자. 다양한 특강도 마련하자. 지역에 현수막도 내걸고 비신자 청소년까지 불러 모으자. 체계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역량을 집중해서, 학교나 학원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교육을 제공하자. 내일이 없는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