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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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법 수사, 기울어진 저울추(경향신문, 2016.10.19)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53
조회
532

공직선거법의 공소시효는 짧다. 선거일로부터 6개월이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사람이 국민의 대표로 행세하는 걸 하루라도 빨리 해소하자는 뜻이다. 취지는 좋지만, 제대로 수사를 하려면 6개월의 시한은 아무래도 촉박하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뻔한 범죄야 어렵지 않겠지만,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범죄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를 테면 같은 당원들끼리 돈을 주고받았다면, 6개월 안에 이걸 인지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또 기소까지 하는 건 좀체 쉽지 않다. 경찰이나 검찰이 온통 선거법 위반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늘 사건은 넘치고, 인력은 부족하다는 게 이럴 경우엔 괜한 푸념만은 아닐 거다.


따라서 수사기관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선택과 집중’일 가능성이 높다. 선관위에서 고발했다면 무조건 기소한다거나 고소나 고발이 있다면 기소를 하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 여길 거다. 그렇다고 선관위가 고발했다고 무조건 기소하는 건 아니다. 당장 이번 20대 총선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도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과 염동열 의원은 선관위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자세한 속내야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둘 다 남부럽지 않은 친박 국회의원이니 검찰의 ‘선택과 집중’의 방향이 어떠한지 가늠할 근거로는 충분할 거다. 평소 남다른 정의감을 뽐낸 적이 없었던 선관위마저 검찰의 처분에 반발해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낼 정도니 검찰의 수사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게 그렇다. 19대 총선 때 검찰은 여당 14명, 야당 14명의 국회의원을 기소했다. 딱 절반씩이다. 공평해보이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 2012년 대선을 목전에 둔 상황 때문일까.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20대 총선은 사뭇 달랐다. 여당 11명, 야당 22명을 기소했다. 숫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친박 국회의원들이 죄다 빠졌다는 거다. 김수남 검찰총장은 누가 비박인지 친박인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권력의 풍향에 그토록 민감했던 사람이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을 어떻게 모른다는 건지, 우리야말로 정말 모르겠다. 여당 의원들은 세상이 다 아는 심각한 선거법 위반에도 면죄부를 받았지만, 야당 의원들은 명함을 달라는 시민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덜컥 기소하기도 했다.


권력이나 권세를 뜻하는 ‘권(權)’자는 저울추라는 뜻도 갖고 있다. 권력을 행사할 때는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검찰은 거듭 지적하는 것처럼 형사사법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 독점적 수사권, 기소권, 공소유지권에 형집행권까지 관련 권한을 죄다 틀어쥐고 있다. 이런 제왕적 권력을 지닌 대한민국 검찰의 저울추는 단박에 기울어졌다. 주어진 권한을 기껏해야 5년밖에 안되는 정권을 위해 자의적으로 휘두르고 있다.


범죄 혐의가 구체적인데도 아예 덮어버리기도 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가 뭉개버린 새누리당 지상욱 의원 사건이 그렇다. 이 사건을 담당한 남대문서의 차윤주 경위는 지난주 열린 경찰청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지상욱 의원 사건이 ‘윗선’ 때문에 불발되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초에 지상욱 후보를 지지하는 새누리당 당원들이 다른 당원들에게 현금과 목도리를 뿌렸다는 진술을 확보했단다. 선거를 앞두고 돈을 주고받았다면 통신자료나 금융계좌를 들여다보거나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보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적어도 돈을 뿌린 사람의 금융계좌에 대해서라도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려고 했지만, 윗선에서 못하게 했다는 거다. 차윤주 경위는 그 까닭을 “경찰조직은 계급사회이고, 상부의 지시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곤 남대문서 지능팀장, 수사과장, 서울경찰청의 수사2계장, 수사과장과 수사부장을 ‘윗선’으로 지목했다.


이런 사건, 곧 여당 국회의원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어물어물 덮어버린 게 남대문서의 지상욱 의원 사건뿐일까. 혹시 빙산의 일각은 아닐까. 지상욱 의원 사건이야 차윤주 경위라는 소신 있고 강단 있는 경찰관 덕에 세상에 알려졌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경찰관들이 한둘은 아닐 거다. 경찰청은 이 문제로 진상조사팀을 꾸렸단다. 진짜 진상을 밝히려는 걸까, 아니면 진상조사를 핑계로 차윤주 경위를 압박하려는 건 아닐까.


이뿐만 아니라, 검찰은 총선시민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했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도 무더기로 기소했다. 선거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했던 게 선거법 위반이라는 거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총선 관련 활동을 하며 선관위에 문의도 하고, 기자회견을 미리 알리기도 하는 등, 답답해 보일 정도로 선거법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선관위는 활동가들을 고발했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소를 해버렸다.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 등 맹렬히 활동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으려는 속셈임이 틀림없다. 곧 대선이니 아무래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면 위축될 거라 여겼던 것 같다.


20대 총선 선거법 관련 수사는 경찰이든 검찰이든 수사를 맡을 최소한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균형도 없고, 범죄를 진압하겠다는 수사 의지도 없었다. 그저 힘센 사람들 눈치나 보는 비굴한 타협과 협작, 그리고 은폐만이 있었을 뿐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한다는 법집행 공무원의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는 차윤주 경위 단 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었을 뿐이다. 법이 그리고 법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가 참담하게 무너졌다.


굳이 소득이 있었다면, 다시금 검찰개혁, 그리고 경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뿐이다. 오로지 그것 말고는 소득이 없다. 아 참, 하나 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건재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92033005&code=990100#csidxf1981315a45e9438aa5675d00d8db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