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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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고립을 넘어 세계로(경향신문, 2016.05.19)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43
조회
498

광주는 소리 없는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언론은 침묵했고 소문마저 더뎠다. 광주라는 도시 전체가 금단 구역이었다. 저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광주를 고립시켜 학살마저 없던 일로 만들려 했다. 전두환 일파는 기세등등했고, 모두에게 무서운 침묵이 강요됐다. 광주 밖 사람들이 광주의 실체를 만난 건, 사진과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다. 독일 기자 위르겐 힌치페터가 촬영한 영상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들여온 건 신부 장용주였다. 문제는 이걸 널리 알리는 거였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그 일을 해냈다. 정의평화위원회 간사 김양래와 홍세현이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했다. 성당 한쪽 골방에서 단순 반복의 수공업적 방법으로 비디오테이프를 한 개씩 복사했다. 아날로그 시대였다. 이렇게 만든 비디오테이프 ‘오월, 그날이 오면’은 교회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나와 또래들도 사진과 비디오를 봤다. 참혹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5월 광주를 만나면서 이전까지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되었다.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될 때까지 광주의 진상을 알리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건, 우리 세대의 제일 사명이었다. 우리 86세대 운동권들은 광주에서 다시 태어났다.


청년들만이 아니었다. 1980년 이후 5·18은 가장 첨예한 전선이었다. 1983년 야당지도자 김영삼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시작한 날도, 1984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연대해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발족한 날도 모두 5월18일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는 신부 김승훈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고 밝히면서 당겨졌다. 역시 5월18일이었다. 꼭 그날만이 아니었다. 1980년 이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5월18일이었다.


36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광주 그리고 5·18은 여전히 현재다. 광주를 고립시키려는 세력마저 여전하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이냐 합창이냐는 논란 속에 묶어 두는 건, 5·18을 잊으라는 강요다. 광주가 이룩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사를 무력화시키고 지워버리려는 술책이다. 그 ‘님’이 김일성이라거나, 북한군이 침투해 항쟁을 주도했다는 모략이 반복되고 있다. 헛소리는 장군 출신 보훈처장 박승춘이나, 지만원 등속에서 멈추는 도발이 아니다. 이제는 전두환까지 나서 자신은 광주학살과 무관하다고 우긴다.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했겠느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전두환의 말이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전권을 틀어쥐고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자가, 단지 직함이 국군 보안사령관이었다며 딴소리를 한다. 가해자의 딴죽만은 아니다. 광주를 고립시키려는 집요하고도 조직적인 도발이다.


총칼로 광주를 고립시키려던 전두환 무리의 수작은 끝내 실패했다. 광주 안팎에서의 숱한 싸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지금 광주를 고립시키려는 도발도 광주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 깨뜨릴 수 있다. 다행히, 광주는 외지인의 어설픈 조언에 기댈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광주는 5·18을, 민주주의를 넘어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가치로 승화시켰다. 인권도시가 되겠다는 광주광역시의 노력은 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2007년엔 인권 증진을 위한 조례를 제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2010년엔 인권 전담부서를 만들었다. 전국 최초였다. 광주가 인권도시를 선포하자,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등 광역단체들과 서울시 성북구 등 기초단체들이 광주의 모범을 따랐다. 광주는 인권에 관한 한 늘 한 발 앞서갔다. 시민이 인권침해나 차별을 받으면, 상담, 조사, 개선 권고 등으로 시민의 인권을 챙겨주는 중립기구로 인권 옴부즈맨도 활동하고 있다. 인권침해 감시와 피해자 구조가 역할이다. 선배 김양래를 도와 5·18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하던 홍세현이 광주광역시 인권 옴부즈맨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난 1년 넘게 광주광역시와 민간이 함께 만든 45개 핵심 인권지표 실천계획도 발표했다. 계획만 거창한 게 아니다. 계획마다 주무 부서를 두고, 부수 예산도 함께 발표했다. 학교 밖 청소년, 이주민, 생명, 빈곤, 교통 약자, 비정규직 등 6개 분야에 대해 행정역량과 예산을 집중 투입하겠단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은 아예 “모든 행정은 인권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광주가 다른 도시와 사뭇 다른,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도시가 되면, 고립을 훌쩍 넘어설 수 있다. 5·18은 이렇게 계승되고 있다.


가해자들이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극우세력과 함께 5·18을 논란거리로 만들며 여론을 호도하고 있지만, 광주 5·18은 이미 세계인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5·18 비디오테이프 복사를 책임졌던 김양래는 5·18기념재단 상임이사가 되어, 5월 정신의 세계화를 위해 뛰고 있다. “국내의 일부 논란과 달리, 해외에서는 오히려 5·18이 민중의 위대한 승리로 각광받고 있다.” 김양래 상임이사의 말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만 해도, 10여 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아시아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불리고 있다. 5·18 사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시되고 있고, 올해에만 1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전시회가 예정되어 있다. 5·18은 이렇게 지역, 세대, 심지어 국경마저 훌쩍 뛰어 넘고 있다.


그렇지만 고립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온통 광주 사람들만의 몫처럼 여겨진다. 광주만의 고군분투다. 중앙정부는 관심도 없다. 관심이 없으니 지원도 없다. 하긴 레임덕이라 차관급인 보훈처장의 어깃장을 방관하는 건지, 아니면 군 출신 보훈처장이 대통령의 뜻을 따르는 건지 아리송한 상황이 아닌가. 대통령은 아예 5·18기념식 참석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니 뭘 바랄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