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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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선생의 경우(경향신문, 2015. 7. 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7:33
조회
359

김형근 선생의 경우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김형근. 1978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시대가 좋지 않았다. 세 번의 제적과 복교 끝에 11년 만에야 겨우 졸업했다. 여러 번 체포됐고, 고문과 수감의 고통도 겪었다. 호구지책으로 책방을 열었다. 최초의 직업이었지만, 경찰은 그냥 두지 않았다. 수시로 책방을 뒤지고, 책을 집어 갔다. 불온서적을 판다며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3년 넘는 재판 끝에 전부 무죄를 받았지만, 경찰은 압수해간 3000여권의 책을 돌려주지 않았다. 태워버렸다고만 했다. 더러운 시절이었다. 배상을 받는 게 당연했지만, 그저 더는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민주화운동 유공자에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였지만, 보상 신청도 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는데 부끄러웠단다.


김형근 선생. 사범대학에 입학한 지 21년 만에 늦깎이 교사가 됐다. 작은 시골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농촌지역은 가난했고, 학생들은 방치됐다. 겨우 돈 몇 푼에 몸을 파는 여학생도 있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만, 김 선생은 그럴수록 열심이었다. 도서관 담당을 자청했다. 학생들을 도서관에 잡아두고 늦은 밤까지 공부를 시켰다. 단지 교과공부만 하지 않고, 함께 놀기도 하고 상담도 했다. 학원 강사 경험을 살려 글쓰기 교육도 했다. 학생들은 빠르게 변해갔다. 학생들이 변하니, 학부모와 지역이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은 도서관에 나와 학생지도를 거들었고, 자체적으로 산악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학생들은 교육부장관상, 경찰청장상을 휩쓸었다. 오랜 고초를 겪었지만, 모처럼 기쁨과 보람이 함께하는 살 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동안 일곱 번이나 체포됐고, 숱한 고문도 겪었지만, 진짜 시련은 따로 있었다.


2007년 12월, 대선 직전이었다. 조선일보가 갑자기 김형근 선생을 찍었다. 중학생들을 빨치산 추모제에 참석시키고, 교사들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e메일을 보냈다는 거다. 다 이긴 선거판인데도 그들은 집요했다. 전교조를 겨냥한 색깔론 공세를 위해 1년6개월 전 행사까지 끄집어냈다. 허위 왜곡보도였지만, 수사기관은 조선일보의 요구에 충실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지 두 달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는 현직 교사를 덜컥 구속한 거다. 그렇지만, 원심과 항소심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애초 잘못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집권 한나라당은 무죄 선고에 대해 종북 판사, 좌익 판사 운운하는 막말을 쏟아냈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과거 범민련에 가입한 적이 있으니 이적성이 있다고 대법원이 구체적인 사실 판단에 개입했다. 2013년 가장 나쁜 판결 중의 하나였다. 김 선생의 운명은 이렇게 뒤틀어졌다.


빨치산 운운하는 모략이 먹혀들지 않자, 국가정보원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표현물을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며 별건으로 구속했다. 연합뉴스 등의 보도물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이적성을 가진 사람이니 북한에 이롭다는 거다.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속셈이었다. 국정원은 김 선생을 엮기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과 e메일 감청 등을 통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샅샅이 훑었다. 몇 년 동안의 인터넷 활동을 모두 모아 짜깁기하며 혐의를 덧씌운 거다. 국가보안법은 이럴 때 신통한 무기가 된다. 대학에 입학한 1978년부터 지금까지 꼬박 37년 동안 김 선생은 국가폭력의 희생양이었고, 공안세력의 먹잇감이었다. 그의 삶은 깨졌고, 피폐해졌다. 국가의 공권력은 정당성을 잃는 순간, 그저 몹쓸 폭력이 된다. 


국가폭력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김형근 선생은 지금 말기 암으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의료진조차 더 이상의 진료가 무의미하다며 손을 놓아버렸다. 의사는 그에게 다만 몇 개월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라고 했다. 김형근 선생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