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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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근 일병 아버지 허영춘의 마지막 투쟁 (경향신문, 2016.02.25)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39
조회
477

1984년 4월2일. 강원도 7사단 일반전초(GOP). 허원근 일병이 숨진 채 발견됐다. 내무반에서 50m쯤 떨어진 폐유류 창고 뒤였다. 사건 직후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군복무 염증으로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대장의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기 어려워 자살했다는 거였다. M16 소총으로 오른쪽 가슴에 쐈지만 치명상을 입지 않아서 다시 왼쪽 가슴에 두 번째로 쐈으나, 역시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총구를 오른쪽 눈썹 위에 대고 세 번째 총탄을 쐈고, 두개골 파열로 사망했다는 거다.


아무리 엄혹한 군인세상이라 해도, 이런 수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가족은 당연히 의문을 제기했다. 첫 휴가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무엇보다 1m짜리 소총으로 스스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을 쏘고 자살했다는 걸 믿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허영춘은 1984년부터 줄곧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싸웠다. 고단한,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전두환이 물러나자 희망이 보였다. 없어도 만들어야 했다. 기독교회관에서 135일 동안 농성을 했다. 하지만 국가는 응답하지 않았다. 내내 거리에서 싸웠다. 1998년 정권교체로 묵은 적폐를 해결할 기회가 찾아왔다. 1년 넘게 국회의사당 앞에서 천막농성을 했다. 422일간의 투쟁, 두 번의 겨울을 거리에서 보냈다. 마침내 고된 투쟁이 결실을 맺게 됐다. 2000년 1월15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이 법에 따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설치됐다. 여기까지 오는 데 16년이 걸렸다.


의문사위의 2002년 조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4월1일 밤에 중대장과 간부들의 술자리가 있었는데, 중대장은 허 일병이 끓여온 라면이 맛이 없다며 꾸중하며 때렸다. 그저 구타에서 멈추지 않았다. 술에 취한 선임하사가 새벽께 내무반에서 실탄이 장전된 M16을 들고 왔고, 중대장실 앞에서 대기하던 허 일병을 개머리판으로 내려치고 갑자기 가슴에 총을 쐈다. 술김에 저지른 실수였을지 모르나, 사람을 쏘고도 어떤 구호조치도 하지 않았다. 허 일병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방치됐다. 그동안 가해자들은 허 일병을 내무반 밖으로 옮기고, 사건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바닥 물청소를 했다. 그리곤 폐유류 창고 뒤에 방치된 허 일병에게 2발의 총을 더 쐈다.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께였다. 그리고 자살로 위장하기 위한 어설픈 조작을 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에 아버지 허영춘은 경악했다. 멀쩡한 아들을 군에 보냈는데, 군은 살인과 조작 그리고 은폐까지 거침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 허영춘은 의연했다. 오랜 투쟁이 그를 단련시킨 탓이다. 이제라도 가해자들이 진실을 말하고, 군 당국이 개혁에 나선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아들은 이미 죽었지만,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적반하장이었다. 국방부는 특별조사단을 만들어 의문사위 조사가 조작됐다고 반격했다. 어쨌든 자살이라는 거다. 특별조사단장은 육군 중장 정수성. 지금은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사위와 국방부의 진실 다툼이 반복됐다. 하지만 의문사위는 한시기구였다. 시간은 국방부 편이었다. 기댈 곳이 없었다. 마지막 심정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형사소송이 아니라, 그저 자살인지 타살인지 가려달라는 거였다. 1심에선 타살, 2심은 자살을 오가더니 대법원은 지난해 9월 타살도 자살도 아니란 결정을 했다. 허 일병 죽음은 공식적 의문사가 됐다. 겨우 이런 결론을 얻고자 30년 넘게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숱한 싸움을 반복했던 게 아니었다. 허망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허망한 순간, 아버지 허영춘은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사실 그동안의 투쟁이 오로지 아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는 군대에서 우리의 아들들이 죽지 않도록, 자신 같은 아버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싸움이기도 했다.


아버지 허영춘은 온몸을 던져 내내 투쟁했다. 생계를 돌볼 틈도 없었다. 아직 아들 죽음의 진상조차 밝히지 못했지만, 마지막 남은 소원만 들어준다면, 이 싸움을 끝낼 수도 있단다. 보상금이나 위로금 따위는 필요 없고, 다만 검시제도만 바꿔주면 깨끗이 물러나겠다는 거다.


억울한 죽음은 허 일병 사건 이후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검시를 주도하는 검사 등은 법의학을 모르고, 법의학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남겨 놓은 결정적 증거들을 놓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국방부 조사본부의 과학수사연구소는 경찰과 군의 하부조직으로 이들 기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신뢰의 바탕인 독립성과 객관성이 너무 부족하다. 의문사, 억울한 죽음을 줄이기 위해선 검시 등 사인 확인 제도가 개혁돼야 한다.


아버지 허영춘의 노력으로 17대 국회에서 사인 확인 제도 개혁을 위한 법률이 발의됐다. 과반수의 국회의원들이 공동 발의했다. 여야가 따로 없었다. 사인 확인 전문기관인 ‘세원청’(洗寃廳)을 독립기관으로 설치하고, 법의학을 전공한 법의관을 양성하자는 거다. 조선시대에도 3번이나 검시를 했는데, 한국의 검시 현실은 너무 엉터리였다. 그렇지만, 이 법률안은 검찰, 경찰의 반대 끝에 회기를 넘겨 흐지부지됐다. 11년 전 발의된 법안, 여야를 넘어 187명의 국회의원이 공동 발의했던 법안이니 지금이라도 통과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 법률의 이름은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 바로 ‘허원근 법’이다. 일흔일곱 아버지 허영춘의 마지막 싸움이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