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오창익의 인권이야기

‘4대강 지킴이’ 김종술이 사는 법(경향신문, 2016.09.28)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52
조회
533

김종술.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던 사람이다. 살 만했다. 언젠가 지역 언론운동을 하는 매형이 공주에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제대로 된 지역 언론을 일구고 싶은데, 지역에선 사람이 빠져나가기만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감당할 만한 일인지 따져보기 위해 공주를 찾았다가 금강에도 가봤다.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다니며 멱도 감고 낚시도 하던 강이 바로 거기 있었다. 순전히 강 때문에 이직과 이사를 단박에 결심했다. 금강이 좋아 공주 사람이 되었다.


백제신문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자, 나중엔 사장으로 경영을 책임졌다. 10여명의 기자가 일하며 주간신문, 시사잡지, 인터넷판을 내는 탄탄한 종합언론사였다. 제대로 된 진보적 지역 언론을 만들고 싶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런 꿈에 가까이 가는 것 같았다. 적어도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만날 때까지는 그랬다.


대운하를 추진하던 이명박 정권은 4대강을 살리겠다고 나섰다. 김종술은 무서웠다. 댐 공사로 수몰된 고향이 떠올랐다. 물을 잘못 건드리면 엉망이 된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에 기대 살기에 강이 망가지면 사람들도 망가진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강을 지키고 싶었고, 적어도 강이 어떻게 변하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기자였다. 새벽부터 강에 나가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정권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중앙정부의 하청을 받은 지방정부는 반대여론을 무마하려 했다. 중·고교 학생들을 동원해 금강 유역에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는 봉사활동 점수와 함께 각종 기념품이 주어졌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당장 기사를 썼다. 4대강과 관련한 김종술의 첫 기사였다. 기사가 나가자, 공주시청 공무원이 전화를 했다. 국책사업을 지역 언론이 왜 반대하느냐는 거다.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이틀 뒤엔 민방위 교육에서도 4대강 홍보사업을 한다는 기사를 썼다.


이번엔 광고주들이 전화를 했다. 그런 식이면 광고를 줄 수 없다고 했다. 광고 없는 언론이 계속 버틸 재간은 없었다. 모아둔 돈을 모두 쏟아붓고, 집도 팔았다. 게다가 빚까지 얻었지만, 1년6개월을 간신히 버텼을 뿐이다.


김종술은 백수가 되었다. 기자들 월급 챙기려고 빚을 지는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수입도 없었다. 그래도 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강에 대한 기사는 계속 쓰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 유력한 지역 언론의 사장님이었지만, 이젠 인터넷언론 시민기자라는 직함만 남았다. 생업이 없어진 거다. 그래도 새벽부터 강을 훑고 다니며 4대강 관련 기사에만 몰두했다.


2014년 6월, 정말 끝까지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세는 6개월이 밀렸다. 보증금을 훌쩍 넘어선 규모였다. 임대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게다. 세간과 자동차까지 압류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여기는 그 순간, 김종술의 호주머니엔 5600원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5000원어치 빵을 사고, 수돗물을 잔뜩 받아 배낭을 메고 금강에 나갔다. 새벽부터 걷고 또 걸었다. 사흘째가 되자 빵도 떨어졌고, 기력도 의욕도 없어졌다. 강가에 쓰러지듯 누워 있다가, 강에 뭔가 떠오른 것이 보였다. 그동안 아무리 강을 훑고 다녔어도 볼 수 없던 희한한 생명체였다. 축구공만 한 벌레였다. 4대강 공사의 후유증으로 뭔가가 나타났다고 직감했다. 사진을 찍어 알 만한 연구자들에게 보냈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다. 전문연구자들도 모르는 괴생물체의 정체가 궁금했다. 만져 보니, 물컹했다. 심지어 먹어보기도 했다. 독성이 있는지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기로 한 거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심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김종술은 그렇게 절박했다.


한참 뒤에야 ‘큰빗이끼벌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곤 득달같이 기사를 썼다. 4대강에서 최초로 큰빗이끼벌레가 발견되었다는 기사의 파장은 컸다. 그 파장만큼 김종술의 삶도 더 깊숙이 강속으로 빠져들었다.


지금도 김종술은 일주일에 닷새쯤 강에서 산다. 4대강 사업이 끝난 다음, 그 후유증을 하나씩 짚어 내고 있다. 금강의 물고기 떼죽음이나 녹조 사태도 역시 김종술이 첫 번째로 보도한 특종이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보에 갇힌 강은 흐르지 않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어 갔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금강도 썩어갔다. 악취도 심해졌다. 하지만, 4대강을 밀어붙였던 사람들, 부화뇌동했던 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젠 큰빗이끼벌레도 사라졌다. 그나마 2~3급수 정도에서만 살 수 있는 놈이었다. 이제 금강은 4급수가 되었고, 이놈들도 집단폐사해 버렸다. 이젠 4급수에서만 사는 실지렁이가 나타나고 있다. 4급수, 정제하지 않으면 농업용수나 공업용수로도 쓸 수 없는 완벽하게 썩은 물이 된 것이다.


4대강에 미친 김종술 덕에 우리의 생명이 이렇게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종술은 지금도 4대강 곳곳을 누비며 4대강 사업의 후유증을 파헤치고 있다. 때론 벌에게 쏘이기도 하고, 뱀에게 물리기도 했다. 가난에 시달리는 것도 힘들지만, 부양할 가족이 없어 다행이라며 강을 누비며 살고 있다. 강에 미친 사람 김종술.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늘 새로운 역사를 일궈왔다. 금강 등 4대강도 김종술 같은 사람 덕에 그나마 가쁜 숨이나마 몰아쉬고 있는 거다.


김종술의 고초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애써 모은 자료를 도둑맞기도 했고,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전화도 자주 받았다. 그래도 김종술은 언제나 씩씩하다. 자기 별명이 ‘금강 요정’이라며 능청도 잘 떤다. 우리는 김종술에게 너무도 많은 빚을 졌다. 그에겐 꼭 풀고 싶은 절박한 과제가 있단다. 국회 차원에서 4대강 청문회를 열자는 거다. 이명박을 구속 수사하라는 것도 아니다. 고작 청문회다. 여소야대라는데 그걸 못할 까닭이 있을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82148015&code=990100#csidx20a402da47d024e94121af2c2b1f27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