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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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수용자 사망사건, 이건 아니다 (경향신문, 2016.09.01)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50
조회
682

부산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던 수용자 두 명이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지난달 19일엔 이 아무개씨가, 그 다음날인 20일엔 서 아무개씨가 숨졌다. 둘 다 삼십대의 한창 나이였다. 두 사람은 조사수용방에 격리되어 있었다.


이 방은 규정위반 혐의를 받는 수용자들을 가두는 별도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규율위반실 또는 징벌방이 되기도 한다. 조사수용실 또는 징벌방, 뭐라 부르든 이 방에 갇히면, 교도소 생활은 몇 곱절 힘들어진다. TV 시청, 신문 구독을 금지당하고, 운동이나 가족과의 면회는 물론 편지마저 주고받을 수 없다. 징벌방이 곧 조사를 위한 대기 공간이라는 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혐의만으로도 징벌을 받는다는 거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의 감각은 자유로울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도 교도소에 갇히면 운동시간은 빠트리지 않고 챙긴다. 운동 자체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나가야만 햇볕 한 줌이라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교도소 구내여도 좁디좁은 사방 안과 널찍한 운동장은 공기마저 다르다. 그래서 주말이나 공휴일이라고 운동을 못하게 되면 그야말로 몸살을 앓는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추석이 민족 최대의 명절일지 몰라도, 교도소 수용자에겐 운동도 접견도 못하는 참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일 뿐이다. 평소 신문을 보지 않던 사람도 교도소에 들어가면 열심히 챙겨 읽는다. 광고도 빠트리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TV, 신문을 금지하고 접견마저 차단하는 건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늠하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이다.


조사수용방에는 선풍기조차 없었다. 저 뜨거웠던 역사상 최악의 폭염을 그저 몸으로 버텨내야 했다. 오로지 부채와 하루 세 번만 주는 2ℓ짜리 물만으로 찜통, 가마솥 같은 비유조차 무색한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버텨야 했다. 숨 쉬기도 어려운 곳에 그저 잘잘못을 따져보겠다며 가둔 거였다. 징벌이 목숨보다 중할 수는 없는데, 징벌도 아닌, 징벌을 위한 조사 대기였다니 말문이 막힌다.


물론 교도소 측이 이렇게 할 수 있는 법률 근거는 있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는 증거 인멸이나 위해 우려가 있으면, “분리수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제110조). 꼭 필요한 경우에 선택적으로 할 수 있지만, 징벌대상자가 되면 예외 없이 분리수용을 당한다. 자의적 법집행이 가능한 포괄적 조문 때문이고, 기계적 행정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접견, 서신 등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가능한 처우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 한해 선택적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조문이다. 아무리 양보해도 견딜 수 없는 폭염 속에서 목숨을 빼앗길 지경으로 내몰려선 안되는 일이다.


법률에 따르면 조사를 마치고 진짜 징벌을 시작할 때도, 집행 중일 때도 수시로 건강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같은 법 제111조). 그렇지만 부산교도소는 그러지 않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판가름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수용자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징벌적 구금을 해버렸다. 그 결과는 참담한 죽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일상적으로 건강상태를 확인해야 할 환자들이었다. 서른일곱 이씨는 당뇨와 간질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동료와 싸우다 얼굴 부분에 골절이 생겼다. 당장 눈에 띄는 상처가 있으니 외부 진료를 나갈 수는 있었지만, 더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는 간단하게 무시당했다. 큰 병원에 데려가기는커녕, 아무런 조치 없이 조사수용방에 가둬버렸다. 어지럼증을 호소했지만 묵살당했다. 죽기 전날 가족이 찾아와 큰 병원이 아니라면 교도소 의료병동으로라도 옮겨달라고 호소했지만, 부산교도소는 이 역시 묵살해버렸다.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40도가 넘는 고열로 쓰러진 다음에야 큰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지만, 겨우 심폐소생술만 받다가 사망했다. 180cm가 넘는 건장한 체구였지만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다.


서른아홉 서씨도 지체장애 3급에, 뇌전증과 당뇨를 앓는 환자였다. 동료 수용자와 언쟁을 벌이다 조사수용방에 끌려온 지 열흘 만에 숨졌다. 이씨가 숨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사람이 죽어나갔는데도, 똑같은 일이 다음날에도 똑같이 반복된 거다. 이건 단순히 교도소의 의료체계가 문제가 있다거나, 조사수용방이 사실상의 징벌방처럼 악용되고 있다는 상황을 넘어, 교도소가 사람을 일부러 죽이기로 작정한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들게 하는 일이다. 한 사람이 죽어나간 바로 다음날 같은 곳에서 같은 이유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달리 설명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당국은 조사수용방의 상태를 살펴보는 기본적인 일도 챙기지 않았다. 부상을 입었거나 지병이 있는 수용자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적절한 진료였지만, 교도소는 간단하게 묵살해버렸고, 그 무서운 폭염 속에서 선풍기도 없는 좁은 공간에 가둬버렸다. 그러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용서하기 힘든 일이다.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교도소는 가장 기초적인 국가 기능의 하나다. 누구라도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여름 이 기본적인 원칙이 허물어졌다. 매년 30명 안팎의 수용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올해에만 벌써 5명이 자살했고, 이 두 명의 수용자를 포함해 20명이 병으로 죽었다. 교도소는 죗값을 치르는 곳이지, 사람을 죽이는 곳은 아니어야 한다.


폭염은 단박에 끝났지만, 정부가 자초하는 말기적 현상들은 꼬리를 물고 있다. 마치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며 곳곳이 무너지고 있다. 절대 무너져선 안되는 교도소까지 엉망이다. 박근혜 정권 3년 반째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절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