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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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그리고 헌법 읽기 (경향신문, 2016.01.14)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5 12:36
조회
499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다들 스마트폰으로 일정을 챙기는데, 나는 여전히 수첩을 쓴다. 처음엔 연필로 적어두고, 확정되면 여러 가지 색깔의 볼펜을 쓴다. 강의는 파란색,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약속은 빨간색, 가족 모임은 노란색 하는 식이다. 수첩에는 일정만 적어 놓는 게 아니라, 써야 할 원고나 활동계획을 적기도 하고, 읽은 책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을 적어두기도 한다. 어차피 기억은 한계가 있으니 갈수록 수첩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진다. 수첩이 나를 챙겨주고, 때론 나를 이끌어주기도 한다.


내 수첩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오늘은 군에서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노우빈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노우빈 훈련병은 2011년 육군훈련소에서 뇌수막염에 걸렸는데도 해열제 두 알 처방만 받고 방치돼 목숨을 잃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인권운동가로 변모했다. 같은 처지의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인권센터와 함께 전국의 군부대를 다녔다. 어이없는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군인들이 맞는 예방접종은 4종에서 6종으로 늘었고, 뇌수막염 예방접종도 실시하기 시작했다. 상병이 되면 종합검진을 받게 된 것도 어머니의 노력 덕택이다.


그런데도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보고 싶단다. 군에서 자식이 죽은 사람들을 위한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만들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전문적인 영역의 단체를 만드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적어도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손이라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단다. 이소선 어머니도 무슨 전문성을 갖고 활동하지는 않았을 거라 했다. 일단 토요일에 열리는 사무실 개소식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수첩에 적힌 오래된 숙제 중 하나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문제이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잘못된 일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박근혜 정권의 전횡에 맞서 싸우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말 한마디도 제대로 보태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헌법의 정당 해산 조문은 4월혁명의 성과였다. 이승만 정권은 정당 등록 취소라는 행정처분만으로 조봉암의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곧이어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이었고, 대통령 선거에서 30%의 지지를 받았던 독립운동가 출신 거물 정치인에 대한 사법살인이 자행되었다.


혁명은 전횡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했다. 정당 해산의 근거를 헌법에 두고 신설된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 권한을 줬다. 정부가 함부로 정당 해산을 못하도록 한 거다. 헌법재판소가 정당 해산 권한을 다시 갖게 된 것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한 헌법 개정 때문이었다. 역시 항쟁의 성과였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군인들의 포고문 한 장으로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시절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주권자의 결단이었다. 헌법은 정당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로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 보장을 첫머리에 두고, 정당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운영자금 보조를 두 번째 역할로 정하고 있다. 정당 해산은 그 다음이다. 정당은 최대한 보호하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만, 해산할 수 있다는 거다.


정당의 존폐는 주권자의 몫이다. 지지를 받으면 집권도 가능하고, 외면당하면 명맥만 유지하거나 스스로 해산할 수밖에 없다. 만약 통합진보당의 문제가 심각해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면 시민의 외면을 당해 저절로 도태되게 놔두면 그만이다. 그게 헌법의 원칙과 대한민국의 품격에 맞는 가장 적절한 처방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과 헌법재판소는 그러지 않았다. 헌법에 정당 해산 조항이 있다는 건, 정부의 정당 해산 제소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은 독립적으로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지, 이렇게 쉽게 끝장을 내라는 게 아니다.


헌법이 정당 해산의 기준으로 제시한 ‘민주적 기본질서’는 정당이 민주적 가치와 이념을 충족하는지, 주권자의 참여가 일반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보장되는지를 뜻한다. 박근혜 정권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이 최종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거라 했지만, 사실 넘겨짚기에 불과했다. 통합진보당은 단지 추정과 황당한 의심만으로 강제해산을 당한 거다. 이렇게 지난 국회의원 총선에서 219만8405명의 유권자가 선택하고, 10.3%의 정당 득표율을 거둔 공당이 단박에 사라졌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대통령 탄핵이나 신행정수도 이전에서도 보았듯이 헌법의 힘은 막강하다. 그 막강한 힘의 쓸모는 오로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고위 규범인 헌법에 정해 두고, 대통령이든 국회나 헌법재판소든 국가권력이 함부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다. 국가의 권력 작용을 헌법에 구속시키는 거다. 바로 입헌주의 원리다. 그렇지만, 오늘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권력이 의도를 갖고 권력을 휘두를 때만 막강한 힘을 보여줄 뿐,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때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헌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민망할지도 모르겠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바쁜 사람들에겐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상식이 상식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시절,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조차 어색한 각자도생의 시대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교육을 통해 양성되듯, 헌법의 주인이란 자리도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고 주인 대접을 받으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시작은 아무래도 헌법을 읽는 것부터여야겠다. 마침 오늘은 박종철의 기일이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 물고문이 자행되던 그 욕조에서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이 시작되었다. 박종철을 생각하며 헌법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