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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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와 인권의 부적절한 관계(사목 2003년 8월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0 18:10
조회
581

우리 현대사와 인권의 부적절한 관계


오 창 익(인권실천 시민연대 사무국장)


인권이란, 말 그대로 '사람의 권리'이다. 인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권리─우리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 모두가 존엄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이며, 대체로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인권이란 개념은 근대 시민혁명 이후 발전해 온 개념인데, 사실상 사람과 사회에 대한 거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에 규정되어 있는 인권의 목록만 대충 살펴보아도 인권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생명권,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 노예가 되지 않을 권리, 고문받지 않을 권리, 법 앞에 평등한 대접을 받을 권리, 법원에 의해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 자의적인 체포·구금·추방을 당하지 않을 권리, 공정하고도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 재판이 끝날 때까지 무죄로 추정받을 권리, 하지 않은 일로 처벌받지 않을 권리, 사생활과 명예를 보호받을 권리, 거주 이전의 자유, 출입국의 자유,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에서 피난처를 구할 권리, 국적을 가질 권리, 혼인하고 가정을 꾸릴 권리, 가정을 보호받을 권리, 재산을 소유할 권리,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의견과 표현의 자유,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 대표를 선출할 권리, 공무원이 될 권리,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직업선택의 자유, 동등한 노동에 동등한 임금을 받을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식량 의복 주택 의료 등에서 적당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교육받을 권리,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누릴 권리, 지적 재산권 …….


이렇게 인권은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개념인데도, 흔히 인권이란 말을 들으면'국가보안법, 고문, 양심수, 공권력에 의한 폭력' 등 전체 인권문제에서 볼 때 매우 좁은 영역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 때문이다. 인권의 지평이 교육받을 권리, 진료받을 권리, 의식주의 문제까지 넓혀지지 못하고, 국가폭력에 대한 소극적 저항 정도에 국한되는 것 자체가 우리 현대사와 인권의 부적절하고도 어정쩡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1.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살펴본 우리의 인권 의식


먼저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주민등록번호와 주민등록증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만 17세가 되면 자신이 사는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받는다. 만 17세면 대충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로 주민등록증을 받으면서는 이제 어른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주민등록증을 둘러싼 환경이 한국만의 독특한 반인권적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주민등록증을 받기 전에 먼저 받게 되는 것이 주민등록번호이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출생신고를 할 때 13자리의 고유번호를 받게 된다. 주민등록번호 13자리 중에서 앞의 6자리는 생년월일이고, 뒤의 7자리는 성별과 출생지를 알려주고 있다.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한국에서 주민등록번호는 아주 다양하게 사용된다. 금융거래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인터넷 공간에서도 빠지지 않고 주민등록번호를 묻고 있다. 최근에는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빼내 범죄에 사용했다는 언론보도를 곧잘 접할 정도로, 주민등록번호만으로도 다른 사람 행세가 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또 우리는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동사무소에서 열 손가락 지문을 찍어야 한다. 이때 찍은 지문은 경찰청 감식과에서 관리하며 오로지 범죄 수사용으로만 쓰이는데, 이것은 주권자요 납세자인 국민이 오히려 정부에 의해 예비범죄자로 간주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번호, 지문날인 등의 제도가 도입된 것은 1968년이다. 1968년에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울진 삼척 사건 등 일련의 북한 관련 안보 문제가 터졌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바탕으로, 간첩을 색출하고 안보를 튼튼히 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예비군 제도를 창설하는 등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 주민등록제도가 3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주민등록번호를 외우지 않고서는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번호, 지문날인 따위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우리의 기준으로 다른 나라를 보면 저렇게 해서 어떻게 나라가 유지될까 싶을 정도이다. 일단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열 손가락 지문을 찍게 하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일본이 재일교포 등 외국인 등록에서 지문날인을 하게 하자 당장 한국 사람들은 반인권적이라고 비난했다. 일본은 국내외 압력에 밀려 외국인 등록시 지문날인을 없앴지만, 한국은 정작 자국민 모두에게 지문을 찍도록 한다는 사실을 일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도 범죄자에게만 범죄 수사용으로 지문을 찍게 할 뿐이다. 또한 미국이나 일본에는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국가신분증제도가 아예 없다. 그러면 선거는 어떻게 하느냐는 의문도 생길 법한데, 선거 때가 되면 투표하라는 안내장(투표통지표)이나 한 장 들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운전면허증이나 사회보장 카드 등 특정한 목적을 위한 신분증을 내밀면 그만이다.
독일헌법보호청(한국의 헌법재판소)은 주권자이며 인권을 지닌 국민에게 무슨 공산품에다 하듯이 고유번호를 매길 수 없다고 판결하기도 하였다. 의미 없는 번호는 고사하고, 번호만 알면 언제 태어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까지 모두 알게 하는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인 셈이다.
단지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번호, 지문날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징병제로 운영되며 어떠한 양심도 허용하지 않는 군대가 그렇고, 하지 않은 일도 처벌하게 하고 고무니 찬양이니 하는 것들도 처벌하게 하는 국가보안법이 그렇고, 군역을 마친 다음에도 만 45세가 되도록 예비군이니 민방위니 하며 상시적 동원체제를 가동하고 있는 것도 다 같은 이치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역대 정부는 국민들에게 언제나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하며,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자 노력하였다. 개인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 인권도 국가가 있어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고(패망하여 보트 피플로 떠도는 월남사람들을 보라고 하면서), 특히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민족의 반쪽이 전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이고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상황에서 공멸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개인의 인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커스틴 셀라스의 「인권, 그 위선의 역사」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국가 주권은 제대로 된 인권보장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은 이 일반적인 상황에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5명의 대통령이 1948년부터 1998년까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최고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인권을 탄압하는 상황이 계속되었기에, 한국에서의 인권은 땅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씨앗조차도 뿌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2. 참정권 투쟁과 인권


서구에서의 인권은 근대 시민혁명 이후, 18세기에는 시민적 권리, 19세기에는 정치적 권리, 20세기에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의 면에서 발전을 해왔다. 인권의 역사는 곧 민주주의의 역사였다. 인권의 역사는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권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정치적 권리의 핵심인 참정권 실현의 역사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인류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선물을 선사한 프랑스의 경우에도 시민계급이 최초로 참정권을 획득한 프랑스 대혁명 직후에 실제 참정권을 얻은 사람들은 전체 유권자의 3%에 불과하였다. 아예 없었던 권리를 얻은 것이기에 대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이기는 했지만, 그 시작은 너무도 미미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정 연령 이상의 남성들이 참정권을 보장받은 것은 1848년이었지만, 여성들까지 참정권을 보장받은 것은 놀랍게도 남성의 경우보다 100년이나 늦은 1946년의 일이었다. 남성들에게만 참정권이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태가 종식된 것은 여성들의 피나는 투쟁의 결과였다. 100년 동안 여성들은 참정권 보장에 대한 요구에 대해 '미친년' 소리를 들으며 진짜로 미쳐가야 했고, "우리에게 권리란 오로지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밖에 없다."는 절규에 대한 답은 여성에게는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밖에 없음을 입증시켜 주는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흑인을 포함하여 일정 연령 이상의 남성들이 참정권을 확보한 것은 남북전쟁 직후인 1870년이었지만, 여성들은 50년 뒤에나 참정권을 보장받게 된다. 이 50년의 간극을 메운 것 역시 여성들의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인류가 함께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하는 3월 8일도 참정권 확보를 위해 뉴욕거리를 행진하던 여성들이 경찰의 공격을 받아 학살당한 95년 전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의 참정권은 거의 아무런 노력이나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1948년에 갑자기, 그것도 남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1948년의 5·10 총선거 이후 많은 선거가 있었지만, 일반 국민이 유권자로서, 아니 그 이전에 주권자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등 일련의 민주화 과정을 거친 다음의 일이었다. '나를 대표할, 나를 위해 일해 줄 사람을 내가 직접 뽑고 싶다.'는 열망은 1987년 6월의 거대한 함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서구의 경우 이미 200년 전부터 최소한 100년 정도의 역사를 거치면서 경험했던 '인권의 역사'를 우리는 단박에 진전시켰던 것이다. 6월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되고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과거 4·19나 5·18 기념일에 즈음해서는 최루탄 때문에 거리에 나서는 일이 두려울 지경이었고, 일상적인 경찰폭력에 휘둘리면서 대학과 교회 앞에는 당연한 것처럼 중무장한 경찰병력이 버티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학생들 중에서 최루 가스를 맡아본 사람이 전혀 없을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변화도 많았고, 또 여전히 남아있는 숙제도 많은데, 우리의 현대사에서 인권을 억압했던 요소들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방향을 더듬어보자.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인권문제를 악화시킨 몇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다.


3. 한국에서 반인권 문제의 원인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분단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분단은 양쪽의 극한적인 체제 대결을 불러왔다. 체제 대결은 필연적으로 파시즘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내었다. 남한의 '새마을 운동'이나 북한의 '천리마 운동'에서 보듯이 동원 체제는 빠른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낳기도 하였으나, 급속한 성장 위주의 정책과 파쇼적 통제는 국민의 인권을 상시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더군다나 한국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한국민에게 북한이라는 실재하는 적의 존재는 언제나 구체적인 위험으로 인식되었고, 독재정권은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파쇼적 통제를 정당화하려고 위험을 과장하였다.
한국에서는 좌익세력의 준동과 호전적인 북한의 침략이라는 안팎의 적이 늘 상정되었으며, 이 구체적인 적들로부터 한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통제는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미 유럽에서는 18세기부터 보호되기 시작한 시민적 권리조차 원천적으로 무시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경찰은 백주대낮에 지나가는 시민의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잡아서 강제로 머리를 깍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고, 이런 식의 이른바 '장발 단속'에 대해 일반 시민사회조차 '인권침해'라는 의식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인권에 대한 시민들의 감수성은 무디기만 하였다.
둘째 원인은 군부 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이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부터 1993년에 이르기까지 꼬박 32년 동안 한국을 통치했던 것은 쿠데타에 성공한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 등에서 국민들에게 직접 총부리를 겨누고 집단학살을 주도한 것을 비롯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국민들을 탄압하였다. 지금껏 우리 국민들이 인권이란 말을 듣고 '고문, 납치, 의문사, 장기간 구금과 이에 따른 양심수 문제'만을 떠올리게 된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30여 년간의 군부 통치의 결과였다.
1948년 상황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언급하고 있는 거의 모든 권리는 무시되었다. 국민은 주권자로서나,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인권을 지닌 시민으로 대접받기는커녕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서"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고,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원임을 깨달아" 국가발전을 위해 아무런 불만도 제기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야 했다.
셋째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파쇼적 통제가 낳은 반인권적 법과 제도와 파쇼적 폭압 기구들이었다. 국가보안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각종 노동관계법, 이미 폐지된 사회안전법이나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사회보호법은 물론이고, 심지어 법률 체계의 근간이 되는 형법이나 민법 등도 인권을 억압하는 효율적인 통제수단이 되었다. 경찰(치안본부, 경찰청, 대공분실 등), 안기부(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 군대(기무사, 보안사, 계엄군), 검찰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물론이다. 이들은 영장도 없이 민간인을 붙잡아다 2-3개월은 보통이다 싶을 정도로 불법구금을 해놓고 고문을 일삼았고, 이 과정에서 살인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최근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서도 밝혀지고 있지만, 군부 독재기간 동안 최소한 수백 명의 인사들이 파쇼 폭압 기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정통한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반 시민들의 반인권적인 의식이다. 시민들은 국가 또는 파쇼 정권과의 관계에서 보면 인권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자주 인권 가해자의 위치에 서있기도 했고, 구체적인 국가폭력의 방관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시민들의 인권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기득권 세력에 의한 유교적 전통의 왜곡, 파쇼적 폭압의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분단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 등 폭력에 대한 본능적 자기보호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시민들의 책임만 탓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명백한 범죄인 가정폭력에 대해 '맞을 짓을 하니까 맞았겠지.'라거나 '내 마누라 내가 패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우기는 사람들, 아무런 고민도 없이 호주제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당연히 적은 임금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이 인권을 침해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이 그저 전교조가 반대하니까 나는 찬성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시민들의 반인권적 의식까지 무조건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은가?


4. 국민들의 인권 의식과 인권 교육


시선을 잠깐 밖으로 돌려보자. 최근 홍콩에서는 중국과 홍콩 당국이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억압하려는 의도로 국가안전법을 개악하려고 하자, 무려 50만 명이 모여 반대 집회를 여는 등 다양한 민중적 저항이 제기되고 있다. 홍콩 인구가 300만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나, 그보다 훨씬 센 강도의 국가보안법을 일점일획도 어쩌지 못하고, 55년이나 존치시켜 온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와 같은 부러움은 지난 이라크 전쟁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불거졌던 반전평화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등의 일련의 도발적 언행으로 한반도의 전쟁위험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였고, 이라크 다음에는 한반도라는 관측이 공공연하게 제기되는 시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은 동시에 두 개의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반전시위가 계속되었다. 전쟁의 위험과는 도대체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호주 같은 곳에서도 30만 명씩 모여서 미국이 오로지 석유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한목소리로 규탄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한국에서는 매일처럼 반전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소수의 운동권 인사들만 참가했고, 가장 많은 경우라고 해도 그 수가 2천 명을 넘지 않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3일 이내에 1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게 될 것이란 무시무시한 경고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태연했다. 별 상관도 없어 보이는 남의 나라 전쟁에 수백 만 명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평화'를 외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는 참으로 비교되는 태도였다.
인권이란 그저 권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세계인권선언도 강조하고 있듯이 인권을 제대로 지키려면 인권을 지니고 있는 시민들의 공적 책임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왜 한국의 많은 시민들은 최소한의 시민의식, 공동체의식, 인권의식도 결여하고 있는 것일까.
유럽에서와 같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탓인지, 역사가 주는 공포가 여전한 탓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분석이 뒤따라야겠지만, 이기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시민사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한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국제적으로는 민주화에 관한 한 아시아의 리더쯤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은 곪아있는 것이다.
인권운동 현장을 뛰다보면 하고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온통 과거의 해묵은 반인권적 시스템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적 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이것도 실상은 구악(舊惡)에서 탈피하자는 수준이지,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인권 의제를 설정하고, 이를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통해 진전시켜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인권문제에 관한 한 문제제기나 현안에 대한 해결은 모두 소수의 운동가와 운동단체의 몫일 뿐이고, 시민들과는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는 현실도 매우 자주 경험하게 된다. 구체적인 피해자나 이해 당사자가 있는 경우 이들의 요청에 의해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민주 인권 역량으로 축적되지 않고, 해당 사안이 해결되면 다시 예전의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그 시민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자신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열심이지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이웃의 인권문제, 곧 우리의 인권문제에까지 관심을 넓히는 사람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드문 보석 같은 존재이다.
민중은 늘 인권 피해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한완상이 「민중과 지식인」이란 그의 저서에서 했던 지적을 빌리면, 민중은 파쇼 정권과 지배 엘리트에 의해 조직화되고, 동원되고 조종되었으나, 그 와중에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 곧 대자적(對自的) 민중이기보다는 즉자적(卽自的) 민중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민중들이 "의식화된 시민이요, 자기 권리를 알고 그 권리의 합법적인 신장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시민이며, 자기의 의견과 이견(異見)을 떳떳하게 개진할 수 있는 공중(public)"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큼 해방 이후의 현대사 속에서 반인권적 폭압이 우리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크고, 고질적이고, 악랄하며,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70년대 가장 노골적인 인권침해의 대상이었던 김대중 씨가 대통령을 지냈고, 6월 항쟁 기간에 시위대와 함께 거리를 누볐다는 노무현 씨가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아무리 상흔이 크다고 해도 시민들의 반인권적 태도와 이중성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김녕 같은 인권학자들은 그 답을 인권교육에서 찾고 있다. 고대 희랍의 디오게네스가 대낮에도'사람을 찾는다.'며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옛날에는 물론이고, 지금은 더 '사람다운 사람'을 찾기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그게 제대로 된 인권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월간 「인권연대」 (2000.4.) 참조). 세계인권선언은 "교육은 인격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경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네 교육은 그저 돈을 더 많이 벌고, 안락하며 기왕이면 사회적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도교육이나 교회교육이나, 가정교육이나 어떤 공간에서도 누구도 인권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가 사람으로서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또한 자신이 존엄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음에도 존엄하다는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이 진행되지 않은 결과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과거 현대사가 주는 상처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제라도 궤도를 수정하고, 과거를 겸허하게 반성하며 구호로서가 아니라 실질로서, 삶의 원리로서 인권과 평화라는 가치를 부여잡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과거에 예속되어 있을 것이고, 스스로의 운명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삶,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고, 그 결과 또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