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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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다(경향잡지 2002년 5월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0 18:03
조회
328

끔찍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보가 국력이다”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오자, 국민들은 드디어 안기부가 거듭날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씨가 그 동안 비밀정보기관에 숱한 탄압을 받았기에 국정원의 역할 변화에 많은 기대가 쏠렸고, 국정원도 다시는 국내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였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국정원의 모습은 과거와 사뭇 달라진 것처럼 보였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제 버릇 누구 못 준다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그게 아니었다. 억울한 희생자를 간첩으로 둔갑시킨 수지 김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무슨 무슨 게이트’에서도 국정원 직원들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음모와 부패도 견디기 힘든 지경인데 국정원은 지금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국정전반에 행사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테러 방지법’의 입법추진이다.
‘테러를 방지’하겠다는데 굳이 딴지를 걸 이유는 없다. 그러나 법안을 조금만 읽어보면, 이 법의 목적이 테러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데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국정원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이 법을 통과시키려 하고, 민주당은 이유없이 부화뇌동하고 있다.
자, 그럼 간략하게 ‘테러방지법’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목적, 처벌대상과 범위 등이 모호하다. 이 법은 테러를 “정치적, 종교적, 이념적, 민족적 목적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그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행하는 행위로써, 국가안보 또는 외교관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모호한 규정은 수사당국(국정원)이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가를 생각하면,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법으로 6개나 되는 테러 관련 조직이 신설되는데, 이는 모두 국정원이 주도하게 된다. 테러 사건이 ‘예상만 되어도’ 조직을 만들 수 있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물론이고 공항, 항만 등의 각 시설에도 국정원이 ‘테러’를 핑계삼아 안정적으로 전횡을 일삼을 수 있다. 물론 예산과 인력은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앞으로는 국가 중요시설, 다중 이용시설 등에 군병력을 일상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된다. 이제 학교 앞이나 역, 터미널에서도 경찰 대신 총을 든 군인들이 불심검문을 하는 모습을 날마다 보게 될 수도 있다. 최소한의 훈련을 받았다는 경찰도 곧잘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데, 젊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불심검문, 보호조치, 위험발생 방지, 범죄의 예방과 제지를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계엄상태와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다. 테러 범죄를 신고하지 않아도 처벌(3년 이하의 징역)되고, 허위신고나 허위사실 유포도 처벌(2년 이하의 징역)되고, 허위사실을 이용하여 협박을 하거나 협박을 가장하여도 처벌된다. 장난전화 한 통 잘못하면 징역 2년의 중형에 처해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저 혐의만 있어도 꼬박 이틀 동안은 영장없이 통신을 감청할 수 있고, 외국인의 경우에는 일주일 동안 영장없는 감청도 가능하다.
한국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테러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나라이다. 국민 모두 17세가 되면 열 손가락 지문을 찍어 정부에 제출하고, 국민의 지문은 경찰이 전산망을 통해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주민번호로 대표되는 국민 통제 시스템은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한국은 일정기간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열 손가락 지문을 받아두고 있다. 전화, 팩스, 휴대폰, 이메일 등도 정부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테러의 위험은 있을 수 있다. 위험이 있다면 힘을 다해 막아야 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국정원은 월드컵 핑계를 대고 있는데,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월드컵은 정말이지 핑계에 불과하다. 월드컵과 관련해 이미 테러 대비는 다 끝났고, 우리에게는 세계 최강의 경찰특공대도 있다. 1988년 올림픽이나 2000년의 아셈 행사도 별탈없이 치를 수 있었던 것은 테러의 위험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대비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고, (국민들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내외국인들에 대한 감시 시스템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테러 방지법을 만들려고 하는가. 수많은 인권 시민사회 단체가 반대하고, 대한변협과 국가인권위도 반대하고, 한나라당까지도 소극적인, 그래서 “국가보안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법”이라 지탄받는 악법을 왜 굳이 만들려고 하는가. 국정원을 위해서라면 국민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단 말인가.


오창익 루가/인권실천 시민연대("www.hrights.or.kr)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