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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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검사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0:35
조회
607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권이야기 2004. 3. 8


인권과 검찰, 세 번째 이야기


재소자들이 말하는 검사들


지난 금요일(19일) 여주교도소를 방문하여 재소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날 만난 재소자들은 이미 경찰과 검찰에서의 조사를 거쳐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수감중인 기결수들이었다. 
경찰과 검찰에서 수사를 받을 때 문제는 없었는지, 피의자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미 형이 확정된 재소자들은 거침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나눠주는 관식의 질이 너무 형편없었다는 이야기(매끼니당 약 800원 정도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도시락을 보급하는 민간업자의 이익까지 포함된 것이어서 꽁보리밥에 단무지 서서개가 반찬의 전부이다)에서부터 수갑이나 포승을 너무 꽉 묶는다는 이야기, 덮고 자는 모포의 위생상태가 나빠서 악취가 심하다는 이야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과정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수사를 받고난 다음, 똑같은 내용의 수사를 다시 검찰에서 받아야 하는 '이중수사'의 문제점이 한결같이 지적되었다. 범행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유무죄를 다투는 것도 아닌데도 경찰에서 며칠씩 받았던 조서는 검찰에서는 제대로 참고조차 하지 않고, 기본적인 사실부터 다시 조사를 해야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또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고 있으며, 기자 등의 출입이 자유로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는 어느 정도의 자기 방어가 가능했으나, 검사와 참여계장이 근무하는 밀폐된 사무실에서는 협박, 욕설, 폭행 등의 가혹행위가 자행되어도 아무런 자구노력을 할 수도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검사들(검찰총장 등 요직에 근무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김기춘(40대 법무부장관, 22대 검찰총장)


검찰총장 재직 : 1988년 12월 6일 - 1990년 12월 5일
법무부장관 재직 : 1991년 5월 27일 - 1992년 10월 8일


헌법재판소가 진행하게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에서 검사역을 맡게 될 인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기춘 의원이다. 김기춘 의원은 한나라당 거제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고, 15,16대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2선의원이다.
경남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1960년 사법고시에 합격하였고, 1965년부터 검사로 일하기 시작하여, 1973년 법무부 인권옹호과장, 1979년 대통령 법률비서관, 1980년 서울지검 공안부장, 1981년 법무부 검찰국장, 1985년 대구지검장, 1986년 대구고검장을 거쳐 1988년에 검찰총장이 되었고, 1991년 법무부장관에 취임하였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이 되어 한나라당 인권위원장, 한나라당 총재특보단장 등의 당직을 거쳤고, 지금은 법사위 위원장이다.
1990년 5.16 민족상(안보부문)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몇 개의 훈. 포장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김기춘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밝혀 놓은 이력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록 독재정권 시절 검사로 일하기는 했어도, 이후 야당의 인권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고, 검찰총수인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법조계의 거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김기춘 의원은 자신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몇가지 이력을 생략해 버렸다. 
그중 하나는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이력이다. 김기춘 의원은 검사로 재직 중이던 유신시절 중앙정보부에서 파견근무를 하기도 하였는데, 단순한 실무작업을 돕는 실무자로서가 아니라, 대공사업을 책임지는 대공 5국장으로 취임하였다. 
과거 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 등에 근무했던 인사들이 국회의원 등 공직자로 일하면서, 이들 기관에서 일했던 경력자체를 아예 생략해 버리는 것은 비단 김기춘 의원만이 아니다. 안기부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는 정형근 의원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들 어두웠던 과거라며 묻고 싶어하는 것 같다. 김의원이 중정에서 간부로 일할 때 했던 일들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근무하던 1975년은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박정희 1인의 영구집권을 위해 남산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던 시기였다.


김기춘 의원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초원복국집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92년 12월 11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의 한 식당인 초원복국집에 모인 부산지역의 기관장들이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 몰표 유도 방안을 모의하다가,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측 인사들에 의해 발언내용이 밝혀진 사건이다. 
이날 모임에는 김기춘 전 법무장관,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기무사 지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등의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참석하였고, 이 자리에서 김기춘씨는 "당신들이야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것이고,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라며 불법선거운동을 사실상 지시하였고, 훗날 경찰청장이 된 박일룡씨는 "이거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라고 화답하기도 하였다. 
당시 지역감정을 동원한 불법선거운동을 진행하였던 기관장들은 승승장구하였고, 오히려 폭로를 했던 정몽준 의원이 기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선거를 앞둔 미묘한 시기이긴 하지만, 김기춘 의원의 다시 따라가 보도록 하자. 1939년 태어나서 경남지역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고, 대학교 3학년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군생활은 해군 법무관으로 대신하였고, 이후에는 검찰에서 승승장구하였으며, 주로 공안분야에서 정권안보를 위해 노력하였고, 유신헌법의 초안작성, 중앙정보부 파견근무 등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 노태우정권에 이르기까지 출세를 거듭하여 검찰총장(1988년 12월 - 1990년 12월)과 법무부장관(1991년 5월 - 1992년 10월)을 지냈다. 법무부장관을 그만둔 다음에는 초원복국집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였고,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전혀 성격에도 맞지 않는 한국야구위원회 위원장(KBO 총재)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1996년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지금은 국회 법사위원장이다. 또 잘 알려진 것처럼 대통령탄핵소추사건의 소추위원(검사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어떤 정권이든, 그 정권의 도덕적, 역사적 정당성은 물론이고, 법적 정당성마저 결여한 정권에 대해서는 충성에 충성을 거듭하고, 노골적인 불법행위도 마다하지 않고, 정당성 없는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처단하던 인사가 지금은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수구세력의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태정(40대 법무부장관, 28대 검찰총장)


검찰총장 재직 :1997년 8월 7일 - 1999년 5월 24일
법무부장관 재직 : 1999년 5월 24일 - 1999년 6월 7일


우선 김태정씨의 이력을 살펴보자. 
김기춘씨와 마찬가지로 일선 검사생활을 하다가, 법무부 송무과장, 대검 중앙수사부 과장, 서울지검 동부지청장, 법무부 기회관리실장, 법무부 보호국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부산지검장, 법무부 차관을 거쳐 검찰총장이 되었고, 검찰총장을 퇴임한 바로 그날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1년 태어난 김태정씨는 부산출생인데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법대에 입학하였고, 대학졸업하던 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다들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해군 법무관으로 군생활을 하고, 1970년 대구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검사생활 27년만에 검찰총장이 되었고, 검찰총장에서 바로 법무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태정씨는 공안분야에서 활약한 김기춘씨와 달리 특수분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옷로비사건으로 법무부장관직을 그만 둔 다음에는 옷로비 사건과 관련하여 내사보고서를 외부로 유출하고 이를 변조한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구치소에 구금되기도 하였으나, 지난해 12월말 대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기도 하였다. 지금은 법률회사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법무부장관직에서 해임된 직접적인 계기는 진형구 대검공안부장의 파업유도 발언 때문이었다. 
김씨는 김영삼정권 시절 최초의 호남출신 검찰총장에 임명된다. 김씨에 대해서는 영남사람이다, 호남사람이다 하며 그의 고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기도 한데, 김씨의 부친은 전남 장흥 사람이고, 사업 때문에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 김씨는 부산 영도구에서 출생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부산에서 생활했으며 한국 전쟁 때 어머니의 고향인 여수로 돌아와 초등학교를 마쳤고, 중고등학교는 호남지역에서 다녔다. 김씨가 최초의 호남출신 검찰총장이다, 고향이 두개다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 것 자체가 검찰조직이 대통령의 고향 후배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대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정씨는 유신시절에는 서울에는 오지도 못하고 지청만 6군데를 옮겨다닐 정도로 검찰의 한직을 전전하다가, 전두환 정권에 들어오면서부터 요직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982년 그는 당시 김석휘 검찰총장의 눈에 들어 의정부지청 부장검사에서 대검 중수부 3과장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대검 중수부장이 될 때까지 주로 특수분야에서 활동한다. 대검 중수부장이 되어서는 군 인사비리와 율곡비리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여, 전 국방부장관, 전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등의 수뇌부를 구속하기도 하였다. 이때 떨어진 별이 27개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민주당에 입당한 김종인 민자당 의원을 동화은행비리와 관련하여, 상지대 이사장이던 김문기 전 민자당의원을 재단비리와 관련하여, 슬롯머신 수사에서는 박철언 전 국민당 의원과 엄삼탁 전 병무청장을 구속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건개 고검장을 구속하기도 하였다. 
이렇게만 설명하고 말면 그가 검사로서 일했던 행적이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김씨가 중수부장으로 일하던 때는 김영삼씨가 집권에 성공한 1993년이었다. 지금의 상황도 비슷하지만, 1988년, 1993년, 1998년 등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는 해마다 대검 중수부는 이른바 '개혁' 차원에서 무서운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칼은 철저하게 이미 지나간 권력만을 겨냥하였다.


김태정씨는 검찰총장 재직 당시 이종기변호사 사건으로 비롯된 심재륜 고검장의 항명파동과 소장 검사들의 저항 등 위기에 부딪혔으나, 1999년 진행된 개각에서 검찰총장에서 바로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다. 검찰총장을 지낸 사람이 법무부장관에 임명되는 것은 초대 검찰총장 권승열씨가 2대 법무부장관에 임명된 다음부터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인사이다. 이는 법무부를 통해 안정적으로 검찰조직을 장악하기 위한 정권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고, 법무부를 통해 검찰을 장악하기에 가장 적당한 인사가 직전에 검찰총장으로서 검찰조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김태정씨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검찰총장에서 바로 법무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개의 특별검사 국면을 맞아 15일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구치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지냈던 인사가 구속기소되어 구치소에 수감되는 모습은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김태정씨가 검찰총장에서 법무부장관으로 영전으로 거듭하는 상황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김태정씨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신뢰였다. 정권교체를 통해 대통령이 취임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검찰총장을 경질할 수도 있었으나,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을 그대로 두었고, 숱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냥 자리를 지켜준 것만 아니라, 이미 옷로비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보란 듯이 법무부장관에 임명하여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김대중씨는 검찰의 위기를 넘어서 정권적 차원의 위기까지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 왜 이토록 김태정에 집착해야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선거운동 당시 비자금 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까지 나서서 장관의 경질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나서서 "마녀사냥 식 장관 몰아내기는 안된다"고 단호한 어조로 그를 보호하였던 것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김대중씨의 정치적 필요는 곧 검찰권의 안정적 장악이었던 것이다. 정치권력은 기소독점, 기소편의에서 볼 수 있듯이 법률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검찰조직을 장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집권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장악을 위해 끊임없이 정치검사를 양성하고 이들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군인들이 직접 정치를 할 때야 검찰을 장악하고 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총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점차 민주화가 진행되면서부터는 법적 정당성, 절차적 정당성 같은 것이 중요해지기 시작하였고, 이로서 집권세력은 검찰권에 대한 장악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