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오창익의 인권이야기

검찰, 권력에 철저하게 기생해 온 치욕의 역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0:31
조회
701

오늘은 검찰의 역사를 살펴본다. 

<현대 검찰제도의 맹아기>

검찰의 역사는 근대사법의 역사와 짝을 같이 한다. 1894년 갑오개혁의 성과로 형조가 폐지되고 법무아문이란 이름의 부처가 설치되고, 이듬해인 1895년 3월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되어, 근대검찰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때 최초로 [검사]라는 용어와 관직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때는 독립된 검찰기구는 아니었고, 재판소의 직원으로서 소추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제도가 정착되기도 전에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진행되었고, 검찰제도를 비롯한 근대사법제도는 사라져 버리게 된다. 



<해방 이후부터 이승만정권시기까지>

해방이 된 다음에도 검찰은 법원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대법원내에 검사국으로 편재되었으며, 대법원의 검사국장이 형사소추 등의 검찰사무를 총지휘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된 직후 남조선과도정부법령 213호로 검찰청법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검찰조직을 구축하게 된다. 초대 검찰총장은 권승열씨였다. 헌법의 기초 작업에도 관여했던 권승열씨는 1925년 일본대학 재학중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이래 20여년간 변호사생활을 하였고, 해방이 되자, 사법요원 양성소 부소장과 법무부차관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다. 권씨는 백범 김구선생의 임시정부가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미리 지목할 정도로 친일과는 일정한 거리에 있었던 인사로서, 반민특위의 특검관장(검찰총장 겸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에 의해 암살대상으로 꼽히기도 하였으나, 사전 정보 누설로 암살을 모면하게 된다. 


그러나 권승열씨는 검찰총장에서 법무부장관(이인씨에 이어서 2대)으로 영전하고,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으로 곧바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검찰이 철저하게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한데, 이같은 전통(?)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 검찰을 총지휘했던 인사를 장관으로 영전시킨 다음에 그를 통해 검찰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그러니까 이미 정부 수립단계부터 써먹던 해묵은 통치술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권승열씨는 법무부장관에 취임한 이후 국가보안법의 제정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국가보안법의 최고형을 사형으로 올려줄 것을 국회에 요구하면서 "국가보안법은 치안을 유지하고 국가를 지키는 '총과 탄환'"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검찰을 장악하고자 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는 집요했는데,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2일에는 2대 검찰총장인 김익진을 서울고검장으로 강등하고, 서상권 서울고검장을 검찰총장에 임명하였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조치는 해방 이후 경찰이 대대적으로 좌익사범을 검거하였으나, 검찰단계에서 석방되는 일이 빈번하자 이에 대한 정권적 경고의 차원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 김익진 총장은 "경찰관의 증거수집 능력이 부족하다. 경찰조사에는 의견만 있고, 증거는 없다. 의견만으로 재판에 붙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4.19 직후인 1960년 5월 취임한 이태희 검찰총장의 경우에는 앞서 소개한 김익진 총장에 대한 강등인사가 있자, 법원에 '인사처분무효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 검찰총장이 되자 검찰내부에 대한 숙정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정권 때도 검찰의 권력의 시녀였으나, 검찰지도부나 구성원들이 검찰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저항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여러 번의 내홍을 겪기도 하였다. 이 당시 법원과 마찬가지로 검찰도 비교적 의기(義氣) 같은 것이 살아 있었으며, 권력의 크기도 경찰에 비해 보잘것없이 작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검찰의 위상에 본질적인 변화의 계기는 역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였다. 박정희는 육군법무감실 검찰과장 장순영 대령을 검찰총장에 임명하였고, 1963년에는 36세의 신직수변호사를 전격적으로 검찰총장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신직수씨는 1971년 6월까지 무려 7년 반 동안이나 검찰총장으로 재직하였고, 1973년 12월부터 만 3년 동안은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재직하였다. 


장순영이나 신직수의 검찰총장 임명에서 보듯이 박정희는 검찰조직을 한마디로 "떡주무르듯" 했다. 위계나 최소한의 원칙도 없었으며, 검찰조직은 쿠데타를 감행한 군인들의 이해와 요구만을 충실해 대변하면서 법적 절차나 밟는 전형적인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통제는 완벽했으며, 저항은 없었다. 저항은 없었다.(사법부에서는 그나마 이승만 정권시절 검찰의 일부 간부가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저항 - 사법 파동- 이 있었으나, 검찰은 무풍지대였다) 


총칼 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찰은 형사사법제도에서 아무런 여과장치도 되지 못했다. 경찰과 중앙정보부와 군이 만든 시국사건을 그저 통과만 시켜주었을 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고(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검사는 그래도 그만 두면 변호사로 개업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 유명한 대표적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검찰이 공범관계인으로 등장하는 사건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당시 법무부 인권옹호과는 인권과로 부처의 명칭을 바꾸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당시 재야 법조계는 "그래도 최소한의 염치는 있는 모양"이라는 조소를 보내기도 하였다.
국민의 인권은 후퇴를 거듭하여 그동안 형식적이나 존재하던 제도마저 과감하게 폐지해 버리기도 하였다. 1973년에는 형사소송법을 개정하여 구속적부심사제도를 폐지하고, 재정신청(고소 또는 고발한 사건에 대해 검사가 불기소 처분을 결정하면, 이에 불복하여 고소인 또는 고발인이 고등법원에 불기소 처분의 정당성을 따져 달라고 신청하는 것) 범위를 축소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전두환 정권 시기의 검찰의 위상도 박정희 정권 시기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좀 더 세련된 측면은 있으나, 권력의 시녀로서의 역할은 그대로 이었다. 
검찰 조직 내에서 정권유지의 첨병이 되는 공안부서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1981년에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정치근은 부산지검 검사장을 지내다 곧바로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고검장, 대검차장 등의 최소한의 단계도 거치지 않았다. 정치근은 유명한 공안통이었고, 정씨의 취임으로 공안검사들이 검찰 수뇌부를 대거 장악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 말기부터 검찰총장의 2년 임기제가 정착되었고, 노태우 정권 때는 '범죄와의 전쟁'과정을 통해 검찰권력이 비약적으로 커지게 된다. 
보안사나 안기부와 경찰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지난 시기에 비해,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재야 법조계도 민변의 출범 등으로 시국사건을 비롯한 각종 형사사건에서의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지자, 노태우 정권의 쿠데타 세력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법적 정당성에 집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검찰의 권력이 비약적으로 커지게 된다. 


조금씩 경찰수사에 대한 간섭도 키워나가고, 흔히 하는 말로 '나라 걱정'도 많이 하게 되는 것이 1990년대 초반이후 달라진 검찰의 모습이었다. 



<김영삼정권과 김대중 정권>

김영삼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하나회에 대한 해체와 검찰을 통한 사정 정국을 주도해 나간다. 이러한 모습은 노태우 정권이 5공 비리 청산을 통해 정권의 취약한 기반을 보강하려고 했던 모습과 매우 유사하게 전개된다. 


검찰의 대표적인 나라 걱정은 김도언 검찰총장 시절의 5.18 쿠데타에 대한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정치검찰의 면모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최소한 5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김도언의 뒤를 이은 김기수 검찰총장은 전두환, 노태우씨를 구속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그것은 검찰의 개가가 아니라, 국민의 성과였다. 전두환, 노태우 등 살아있는 권력이 눈짓을 해준 지난 권력의 단죄는 가능했지만, 한보, 김현철 등 살아있는 권력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한없이 정치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김대중정부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검찰은 기소권의 독점, 기소편의주의 등 법에 보장된 무소불위의 권한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나, 1980년대까지는 경찰,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군(보안사 등)의 위력에 눌려 단순한 법적 실무자 집단으로 권력에 기생하였고, 1990년대 들어 막강한 현실적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김대중 정권 시기부터는 '검찰공화국'이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는 검찰이 대통령과 법원을 제외한 누구의 통제도 없이 자율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고, 극히 일부 정치적인 사건에 국한되어서만 대통령에 의한 통제를 받고, 법원에 의한 통제는 그 여과장치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