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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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좌담 [한국교회 인권사목의 방향](사목, 2003년 12월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0 18:24
조회
615

한국교회 인권사목의 방향



 

1. 민주주의와 공동선의 추구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은 상당한 혼란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IMF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말할 정도로 시장의 실물 경제 상황은 극도로 나빠져 있고, 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파병 결정, 새만금 사업과 위도 핵폐기장 건설 논란, 불법적 대선 자금 모금과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 등으로 방송과 신문의 정치면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혐오감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과 고민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해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며, 교회의 사회교리는 이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박문수 
현재의 정치상황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한국사회의 발전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추구할 뿐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적 근대화의 지체에서 오는 현상이니까요. 독재의 잔재,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의 행태를 극복하는 과정이 불과 십여 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아직 비관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동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무수하게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로 피해를 보게 될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고, 국민 전체가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건너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루라도 더 기간을 단축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사회교리의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공동체는 기본적인 의무조차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사목 헌장, 74항) 되는데, 이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정치공동체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특권을 약화시키고, 모든 영역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교회가 기여할 몫이 있습니다.


오창익
저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적이고 인권친화적인지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단지 돈 때문에 목숨을 끊는 사람이 적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의 좌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고, 중산층은 최근 이민 열풍에서 보듯이 한국을 떠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라크전 파병을 획책하고 있으며,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개혁 열망에 힘입어 극적으로 탄생한 노무현 정권은 개혁은 고사하고 정권 출범 이후 단 하루도 영일이 없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극심한 실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신당을 만들었지만, 개혁을 위한 몸부림보다는 그저 배척하고 따돌리기 위한 패거리 정도로만 여겨집니다. 상황은 심각하지만 뚜렷한 대안도 보이지 않는 형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유엔이 제시하고 있는 세계인권선언과 그 뒤를 잇는 각종 인권규약이 이미 우리에게 거의 모든 답을 주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사회교리는 우리에게 너무도 충분한 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구체적인 답을 주고 있지만, 문제는 사회교리가 사실상 위정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보화는 분명하나, 벽장 속에 감추어진 보화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기우
겉으로만 보면 한국의 정치상황은 그 이전에 비해 대단히 혼란스럽게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안을 들여다보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정치 경제적 사건들은 과거에도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단지 그것들이 과거처럼 숨겨지거나 묵인되지 않고 드러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두 번이나 연속해서 비주류 출신의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당선됨으로써 기득권 세력이 독점하고 은폐하며 관행으로 굳혀왔던 것들이 여론의 수면 위로 떠올라서 쟁점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과거 기득권 세력의 방어적 노력들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더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지요. 이렇게 거시적으로는 한국사회가 정상적으로 개혁되어 나간다는 입장에서 사회교리를 근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사회의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이를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정치권력도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정치인과 이들을 감시하는 언론인들이 공동선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회를 비롯한 사회 여론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히 신자 정치인들이나 신자 언론인들, 그리고 선의의 모든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우리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촉구하는 일이 요청된다고 하겠습니다. 현재 시급히 요청되는 공동선을 위한 노력은 정당의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구도에 입각한 정당운영과 정경유착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정부패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개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2. 노동자 문제


올 한 해는 유난히 노동자들의 자살사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계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한 정부와 사측의 손배 가압류와 같은 노동탄압 정책, 그리고 비정규직 차별에 절망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쟁의 행위 중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지난 1990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이 커졌다는 반증이 아닐까 합니다. 노동계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외치면서 출범했던 현 정부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상호 간의 차이를 부각시켜서 노동자 내부의 분란을 획책하는 듯한 인상도 강하게 받습니다.
교회는 이제까지 각종 사회문헌을 통해서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얼마든지 상호협조적인 관계로 갈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런 입장은 자칫 일종의 양비론으로 빠지거나 어떤 입장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특정 맥락과 관계없는 일반적 차원의 입장 제시보다는 개별 사안들에 대해서 교회가 어떤 사회교리적 판단들을 축적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년 우리 사회와 교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성모병원 사태는 상당히 중요한 경험일 수 있는데,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의견 차이가 존재했던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 교회의 노사관이 성모병원 사태를 계기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박문수 
작년 성모병원 분규는 교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것은 일반 국민들에게 교회도 사용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점과 교회의 대응방식이 일반 기업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노사 어느 쪽의 정당성을 논하기 전에 교회가 이런 인상을 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용자로 비춰지는 교회가 한국의 노사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을지 많은 분들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한국사회에서 도덕적 권위의 척도가 되어야 하는 교회가 공권력에 호소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깊이 있게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의 노사관계와는 많은 부분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 노사관계도 이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또 그에 상응하게 기준을 조정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국민들이 1980년대 중반 이전처럼 여전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이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투쟁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생존권을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자는 정당하고, 삶의 질을 추구하는 노동자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작년에도 그대로 인용하였으니까요. 많은 부분 여전히 생존권을 위해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노동자라 하더라도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은 권리입니다.
선진국에도 노사분규는 있습니다. 오히려 더 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노동자의 대응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사측의 입장에는 관대합니다. 이미 잣대가 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의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공정한 시각과 대응방식을 취할 때 도덕적 권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창익 
노무현 정권 초기에 정권의 성격이 친노동자적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볼멘소리가 좀 나오긴 했지만, 실제로 현 정부가 친노동자적 정책을 실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대중 정권에서도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자 정책이 심각하게 진행되었지만, 이때에는 그래도 IMF 탈출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에 기대기라도 했는데, 노무현 정권은 국민적 공감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반노동자 정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통계만 살펴봐도, 지난 5년 동안 노동쟁의 등으로 구속된 노동자가 천 명이나 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구속된 사용자는 겨우 5명에 불과합니다. 노동자들이 사용자들에 비해 2백 배나 더 비도덕적이고, 2백 배나 더 탈법적이고, 2백 배나 더 공동체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드러난 현실은 이렇습니다.
이기우 신부님께서 오랫동안 일관되게 말씀해 오셨듯이, 노동과 자본 문제에서 교회의 선택은 매우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르침대로라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물론 여러 분야에서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은 교회 전체 역량에 비추어볼 때 극히 제한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해 성모병원 노조 파업 사태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태의 원인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워낙 서로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여기서 모두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을 때, 자본의 논리만으로 일관하는 다른 사업장에 비해 오히려 쟁의기간이 길어지고 불필요한 갈등이 심화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 사업장이 전문경영인이 아니라 오로지 사제들에 의해 경영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사제에게 경영공부를 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과감하게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사제들은 다른 면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지난 파업 기간에 서울대교구 많은 신부님들이 이제는 교회가 성모병원 같은 대규모 병원보다는 예전의 산재병원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현재의 국민건강보험제도 안에서 일종의 사각지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교회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파업이 끝나고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는 지금 과연 이것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기우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르면,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함께 '정의' 편에 서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사랑의 정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자와 사용자가 정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교회는 가난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인 노동자의 편에 서지만, 그 노동자들이 정의의 원칙에서 어긋날 경우에는 교회가 반드시 노동자의 편에만 설 수도 없습니다.
작년에 일어났던 가톨릭 중앙의료원 노사분규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의의 길에서 노사 양측이 모두 어긋났던 사례로 진단합니다. 사용자는 실정법상 하자가 없는 조치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 실정법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측면을 간과한 채 병원 경영자의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행동했는데, 이는 가톨릭 의료선교의 존재이유를 생각해 볼 때 대단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한 노동조합 역시 산별노조체제로 전환한 이후 이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용자를 상대로 강경일변도 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많은 신자들과 성직자, 수도자들의 지지를 상실하였습니다.
당시 성모병원은 다른 대학병원들과 비교할 때 그토록 장기적인 파업을 벌일 정도의 비리나 분규 사항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노사 양측이 타협에 이를 여지가 있다는 객관적이고 법률적인 자문을 얻을 수 있었고, 제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결정과 담당 주교님의 요청에 따라 양측의 중재를 시도해 보았지만, 양측의 견해와 관점이 너무 달라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양측의 불신 현상이 대단히 심각합니다. 이것은 병원 경영자의 입장을 떠나서 성직자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이상, 신뢰 회복을 위하여 가톨릭 중앙의료원의 병원사목적 차원에서 앞으로 몇 갑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자선병동을 더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명분을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노사간 쟁점에 대해서는 노동사목자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합리적인 관계를 정립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빈곤문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10월에 발표한 「소득분배 국제비교를 통한 복지정책의 방향」이라는 보고서는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를 객관적인 수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IMF 이전인 1996년과 이후인 2000년도를 비교하면서 절대빈곤율이 경상소득 기준 5.06%(1996년)에서 10.06%(2000년)로 거의 2배 가량 증가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중위소득의 40% 이하를 상대빈곤층이라 했을 때 이 역시도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했을 때 7.65%(1996년)에서 11.53%(2000년)로 증가했고, 절대빈곤선에서 120% 수준 사이의 차상위 계층 역시 2.88%(1996년)에서 4.33%(2000년)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절대빈곤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적어도 차상위계층까지 합하면 우리 사회에 700만 명 가까운 빈곤인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빈곤감소효과를 내는 조세 및 재정정책이 매우 미약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성이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리"(「노동하는 인간」, 19항)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또한 한국교회도 그동안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빈민구제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빈부격차와 빈곤인구의 증가, 그리고 교회 구성원의 중간층화가 심화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지원과 배려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박문수 
지난 백 년 동안 한국의 사회발전을 위하여 특히 빈곤한 이들과 함께한 교회의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여전히 이 역할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역할을 지속하고 있음에도 한국사회에서 과거만큼 왜 인정을 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교회 안에서조차 왜 이런 일들이 쉽게 동의를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교회가 계층 종교화된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빈곤에 대한 태도, 특히 신자들의 의식은 구조적이기보다 여전히 자선이나 구제라는 인식에 머물러있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자선과 구제는 정치적 행동으로까지 나갈 필요가 없는 애긍과 희사의 차원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사회복지는 구조적 원인에 천착해 들어갑니다. 단순한 자선과 구제 차원을 넘어 인간의 권리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빈곤과 빈곤한 이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면 교회의 실천도 이에 상응하여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과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자들 안에 존재하는 인식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가 중산층화된 사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으로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파헤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창익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교회다운 실천을 해야 합니다. 저는 교회단체에서 일할 때나, 지금처럼 교회 밖에서 일할 때나 늘 어떤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데, 한국사회에서 우리 교회가 갖고 있는 힘을 제대로 모으고, 그 힘을 제대로만 쓴다면,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성공회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성공회는 매우 작은 교단이지만, 성공회 대학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연구성과를 자랑하고 있고, 교단 차원에서도 나눔의 집 등을 통해 매우 활발한 사회사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도 많이 갖고 있고, 돈도 훨씬 많고, 신자들도 많고, 더군다나 매번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우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 중에 유력인사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데에는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활적(死活的) 관건입니다. 교회 장상들을 비롯한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이 문제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그 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현장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교회의 사목정책을 수립하는 지도층에게는 비중있게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중산층화되어 감으로써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어져가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고, 오히려 신자 수의 양적 증가를 선교로 간주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알리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거나 이를 덜어주려는 노력이 사회를 향해서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를 향해서도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의 사회현실을 볼 때 신자 전체를 향해서 청빈의 덕목을 강조하는 노력이 대단히 절박합니다. 불로소득을 단죄하지 못하고 청빈을 소홀히 하면 결국 교회는 복음적 매력을 상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목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커지고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며 공동선을 상실해 가는 등의 사회적 현실을 감안하는 것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4. 이라크 전투병 파병


미국의 대 이라크 전투병 파병 요청과 관련해서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파병을 결정하자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파병 반대를 외치는 집회가 연일 개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미국과 조금이라도 사이가 좋지 않으면 무엇인가 큰일이 일어날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위 자체의 도덕성보다는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 우리의 결정이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런 막연한 공포심이 우리 사회의 건전하고 윤리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파병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국익이란 것도 사실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상황은 지극히 현실주의적 고려밖에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고, 교황님과 우리 교회가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려했던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로서는 참으로 큰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박문수 
교회는 공적으로 교회의 입장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에서 성명서를 낸 것은 교회가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저의 입장도 교회의 입장과 같습니다.
문제라면 이러한 교회의 입장이 전 사회적으로 공명을 얻고 있지 못한 점일 것입니다. 1990년대 이후에 교회가 하는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의 공적인 의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교회의 위상이 낮아진 것이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라크인들의 목숨과 파병하는 군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북한의 위협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이 국민들의 생각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도덕과 윤리가 자리잡을 틈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가 있어도 모든 이가 귀를 막고 있는 형국이 요즘 우리의 현실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교회를 비난한다 해도,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교황님이 단호하게 선포하신 것처럼 교회가 할 소리는 해야 할 것입니다. 국익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종교, 인종, 문화,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니까요.


오창익 
교회도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등을 통해 전쟁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면피용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하려는 교회 내의 움직임이 매우 진지하게 진행됨에도 그들이 교회 안에서 워낙 소수이다 보니 전체 교회의 노력으로 읽히지 않는 측면이 있고, 반전평화를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과 동떨어진 채 움직여서 그런지 고립감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이라크 전쟁 초기에 어떤 신부님이 현지를 방문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고, 일주일에 한번씩 명동성당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기도 하였지만, 교회 전체로 보면 극히 미미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모든 이웃의 평화를 기원하지만 정작 평화를 향한 구체적 실천의 차원에서는 조금이라도 자기 것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자신의 생각이든 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당장 이라크 파병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우리 교회는 단호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주님은 국익이니 실리니 하는 허무맹랑한 논리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에 협조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한 어조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당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신자 정치가들이나 정책 담당자들에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저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하여도 이라크 전쟁 등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에 대해 훨씬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마침내 중요한 흐름마저도 바꿔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우 
이 점에 대해서는 주교회의에서도 여러 차례 입장 표명이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주장이 반영되거나 정책 결정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의와 복음 진리에 입각한 전쟁 반대는 반드시 표명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특별히 국익만을 고려한 파병 결정에 대해서는 공동선에 입각해서 논의하고 결정하도록 촉구하는 교회의 노력이 대단히 필요했고, 또 그렇게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파병문제를 결정하겠다는 정부 발표도 있었으니 지켜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5. 북한 인권


지난 4월 16일 제네바에서 열린 제59차 유엔 인권위원회는 북한 인권에 관한 결의안을 다수결로 채택한 바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북한 인권문제가 유엔에서 공식 의제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 결의안을 둘러싸고 한국사회 안에서는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을 갖고 있는 세력들 간에 상이한 해석과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사목」 295호(2003.8.)에서도 이와 관련한 기사를 게재한 바 있지만, 인권문제에서 쉽지 않은 것은 인권에 대한 이른바 보편적 시각과, 그것이 수행되어야 하는 토양의 특수성이 충돌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전자를 강조할 경우에는 어느 체제나 집단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외부적 시선으로 일방적 비판을 제기할 수 있고, 후자를 중시하는 경우에는 극단적인 경우 유신시대처럼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데 이용되어 인권 탄압의 명분을 제공하거나 반인권의 문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차용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형식논리적인 시각일 수 있지만 여하튼 이런 우려가 때로 우리 사회에 현실화되어 대단히 어려운 사회적 논쟁과 물리적 쟁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 한복판에서 교회적 관점과 선택은 어떠해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어떤 방향에서 이런 문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까요?


박문수 
이미 지구화된 현실에서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인권도 보편적인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연례 인권보고서들을 보면 미국의 인권보호도 심각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명분으로 인권을 거론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권이 하나의 명분으로 또는 하나의 수사(修辭)로 사용되는 국제정치의 현실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인종, 국가, 문화를 초월하여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권의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패러다임은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이나 미국의 인권문제가 같은 맥락에서 다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침공의 명분으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유엔인권선언에서 주장하고 있는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사회교리와도 잘 부합하는 것입니다.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 미국, 중국에 대하여도 동일한 교회의 인간이해에 부합하는 잣대로 판단할 때 이해관계로 점철된 국제정치의 맥락과는 다른 우리만의 입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창익 
앞서 드린 말씀에서 이미 답이 나와 있지만, 북한에 인권문제는 분명히 있고, 또 인권문제란 것이 북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북한은 상대적으로 다른 사회보다 더 많은 인권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특장(特長)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권(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영역의 권리들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극심한 경제난, 미국의 경제봉쇄, 독재체제와 정도 이상의 관료주의, 폐쇄성 등이 지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북한 문제를 바라볼 때 특수성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북한 지도부가 북한 인민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고 용인하는 비겁한 태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특수성이란 것은 이슬람 사회를 보듯이, 또는 다른 어떤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회를 보는 정도의 시각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고, 함께 살아가야 할 특수성을 인정하되, 최소한 1948년에 공포된 세계인권선언 정도의 잣대는 들이대야 한다고 봅니다.
북한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인권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북한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외부세력이 아니라, 북한 인민들에게 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한 우리(남한)의 역할이란 북한인민들이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스스로 권리 신장을 위해 고민하고 싸울 수 있도록 돕는 것뿐입니다. 너무 과장하거나 아예 무시할 일도 아니지만, 엄밀히 말해서 북한 인권문제는 북한 인민들의 문제라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이기우 
원칙적으로 보면 북한의 인권 문제나 남한의 인권 문제나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함은 새삼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남한의 인권 문제에 눈감았던 사람들이라는 시각이 있고, 과거 남한의 인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현재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관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에 북한 인민들의 인권을 개선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도 원조는 필수적입니다. 인권 탄압을 빌미로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철회할 수는 없습니다.


6.국가 보안법과 양심적 병역 거부


지난 10월 21일 검찰이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에 대해 "사안이 중대하고 개전의 정이 없으며,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한 바 있습니다. 송두율 교수 사건은 다시 한번 우리 사회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오래된 논제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검찰의 구속 방침에 대해 송 교수를 변호하는 쪽에서는 사상전향제도를 금지하는 유엔인권 규약에 어긋나는 반인권적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1년 12월에 불교 신자인 오태양 씨가 병역 거부를 선언하면서 이른바 '이단들의 문제'로만 취급되던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불거졌습니다. 병역 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이유로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대체복무제도를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복무제를 실시하면 누가 목숨을 걸고 군대를 갈 것인가?', 나아가 '군 복무를 거부하는 자는 이 사회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대체복무제는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가장 오래되고 핵심적인 인권 주제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구체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개신교단을 중심으로 아주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지 290호(2003.3.)에서도 이에 대해 다룬 바 있지만, 아직 교회 안에서는 어떤 공식적인 의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


박문수 
우리 교회도 한국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집단주의적 정서가 지배합니다. 특히 군대문제는 신앙의 입장 이전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라서 타협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강의시간에 이 문제에 대하여 종종 토론을 하는데 젊은이 대다수가 경험하는 일에서 소수에게 예외를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게 됩니다. 안보도 안보지만 군대를 체험한 세대들이 갖는 공통의 피해의식, 이로 인해 형성되는 암묵적인 공모의식이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보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잘 아는 터라 가능하면 이 문제를 피해가고 싶어하고,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국사회 내의 다른 집단들과 근본적으로 입장이 다릅니다. 교회 자신이 이러한 집단주의의 희생자이고,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니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가장 작은 이에게도 연민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셨던 예수님, 정의의 실현이 평화의 조건이라고 보는 우리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권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박해시기 백년 동안 피를 흘렸던 교회가 얻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유와 오늘날 이런 개인의 자유가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런 자유를 보장하고 선언하는 것을 교회의 몫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창익 
교회가 왜 공식적인 입장이 없겠습니까? 한국교회는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때문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남의 자유도 소중하다."는 기본을 우리 교회나 교회 구성원들이 모를 리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이것이 무슨 이데올로기 문제처럼 보이고, 괜히 나서서 이로울 것이 없으니 침묵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양심'을 하느님의 목소리로 배웠습니다. 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무언가 꺼려지는 것이 있고, 괜히 찜찜해지면 우리는 그것이 양심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요청이겠거니 생각합니다. 이것이 대체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어린 시절 배웠던 것처럼 양심이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면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교회가 단호한 입장을 갖는 것도 물론 필수적입니다.
사상전향만 하더라도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 불쾌한 기억이 한둘이 아닙니다. 법무부 장관은 언론에 대해 버젓이 준법서약제를 폐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준법서약이란 변형된 사상전향제이고, 또 헌법 19조의 양심의 자유, 21조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폐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외부에 알려졌는데, 이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준법서약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 나올 때인 1998년부터 양심수들의 거부로 의미가 없어졌고, 가장 최근인 올 4월 양심수 사면 때는 양심수들에게 아예 준법서약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거부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거의 모든 형사사건 피의자들에게 경찰이나 검찰 단계에서 '반성문'과 재범하지 않겠다는 '각서', '준법서약서' 등을 작성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번 송두율 교수 사건처럼 국민적 관심사가 된 사건의 경우에도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기도 하니까 사실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참여정부의 태도는 유감스럽기만 합니다.


이기우 
대체복무제도는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서도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해 온 교회의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남북이 정전상태에서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어서 모든 남자 국민들에게 병역의 의무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안보 현실을 생각하면, 병역 의무는 우리 사회의 공동선의 일부를 감당하는 것이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집총을 양심에 따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형벌을 가하기보다 병역의무기간 이상의 사회봉사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도덕적인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봉사제도를 시행할 때에도 현재의 공익근무제도를 좀 더 개선해서 본인의 희망이 반영되어 사회봉사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휴 노동력을 기간 채우기 식으로 이용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사회봉사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각종 사회복지시설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7. 교회 인권운동의 변화


한국교회가 지난 1970-1980년대에 우리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와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 증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은 교회 내외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교회의 사회적 발언들이 주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는 생명권과 관련한 문제들, 곧 낙태, 안락사, 사형, 인간배아복제 문제 등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인권운동이 변화하게 된 대내외적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또한 최근 주교회의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생명 31운동과 사형폐지운동, 인간배아복제 금지 운동 등은 우리 사회 안에서 이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여론화하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운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앞으로 이런 운동들이 좀 더 발전하려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박문수 
우선 인권운동의 초점이 전이되는 맥락은 한국의 시민사회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가 담당했던 몫들을 시민사회가 공유하면서 우리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협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영역은 신앙의 문제, 복지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문제들의 뿌리를 생명경시 풍토에서 찾은 것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한국사회에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해져 있고, 그러한 의식에 잠재된 엄청난 공격성이 언제든 드러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가 문제의 뿌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라면 이러한 교회의 판단과 실천에 대하여 한국사회가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너무 만연해버린 문제에 둔감해진 탓도 있고, 교회가 공적 의제를 만드는 위치가 아니라는 현실도 부분적으로 원인이 되는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활동의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언론, 텔레비전 공익광고, 활발한 기고활동, 문화활동 등을 통해서 교회의 관심사를 폭넓게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단체들을 지원하고, 우선 신자들부터 이런 의식을 확고하게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창익 
사실 저도 짧지 않은 동안 교회 단체에서 인권운동을 했고,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표현으로 인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형편이 어떤지 뻔히 아는 처지에서 단지 '외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하기는 힘들지만, 이왕 다른 문제도 다 말씀드렸으니, 용기를 내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교회가 생명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하려면 더 확실하게, 좀 더 구체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사형제도 폐지운동 같은 경우에도 좀 더 과감하게 운동을 전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사형폐지 운동이든, 다른 생명권 관련 운동이든 간에, 이것이 교회 공동체 내의 소수가 벌이는 운동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회적 확산은 고사하고, 교회 내 구성원들의 인식을 바꾸어 그들을 실천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생명권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주교회의 등 교회 장상들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데, 다른 수많은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굳이 장상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장상들의 입장에서도 아마도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하자고, 이렇게 해보자고 권하고 설득하고 함께 나아가는 자세가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기우 
교회 인권운동의 변화는 정치적 인권 상황이 상대적으로 개선되고 있고, 우리 사회의 생명권 의식이 여전히 희박한 현실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봅니다. 생명 31 운동이나 사형폐지운동, 인간배아복제 금지 운동 등은 앞으로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하는 연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교회의 인권운동이 눈을 돌려야 할 분야는 사회적 인권 분야입니다. 특히 주거권과 노동권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분야이고 우리 사회는 세계적인 수준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인권운동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답게 주거할 권리와 일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최저주거기준이 법제화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23%의 국민들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최저주거기준을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저소득 실업자들에 대해서도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해서 최저 소득수준을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하도록 돕는 일 역시 사회 안정을 위해서 대단히 필요합니다.


8. 다원주의 사회와 인권


인권문제를 논할 때 교회와 인권운동을 하는 시민사회단체 사이에는 일정한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주로 인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자신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곧 일반 시민사회단체가 말하는 인간이 어떠한 종교적 관점에서도 자유롭거나 자율적인 개인을 말하는 데 비해, 교회가 말하는 인간은 성서적 교의적으로 정의된 인간을 의미하는 데서 오는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의 차이는 개별 인권 주제들에 대한 관점과, 활동 방향 등에도 상당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낙태나 동성애자 문제, 안락사 문제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는 사실 현대사회의 기본 성격이 다원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진리를 외치지만,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는 그것이 상대화되고 이른바 '사회적 합의'와 '개인의 취향'이 진리를 대신합니다. 이 와중에서 교회와 정부, 교회와 일반시민사회단체들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고, 또 불화를 겪기도 하는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에서 접근해야 할까요?


박문수
교회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시민사회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독특한 입장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국가에 대해서만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 되었으나 이제는 시장, 시민사회도 국가에 못지않게 신앙 교의와 충돌하고 있기에 비판적 제휴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무조건 동조할 수 있는 집단은 없는 셈입니다.
현재 한국의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말 그대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가치 가운데 교회가 지지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생명의 문제라든가, 윤리에 해당하는 문제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 그동안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주던 집단에게 비판적 잣대를 들이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에 대해서도, 시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교회에게 절대적 제휴나 동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교회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들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이들이 건강하게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비판적 제휴관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창익
저는 인간의 문제를 바라볼 때 교회의 시각과 일반 사회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든 아니면, 세계인권선언 1조에 언급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존엄하고 평등하든 간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에서의 갈등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낙태문제를 태아의 권리 측면에서 봐야 할지,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 봐야 할지, 아니면 생명의 관점에서 봐야 할지에 대한 차이가 '인권운동' 내부에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짚어야 하고, 가능한 한 합일점을 찾아야 합니다. 안락사, 동성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낙태, 안락사, 동성애 이외에 얼마든지 합의할 수 있는, 많은 인권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합의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함께 협력하고, 교회가 꼭 지켜야 할 무엇에 대해서도 역시 정직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사목헌장에서 가르치는 원칙이 있습니다. 곧 "필요한 일에서는 일치해야 하고 불확실한 일에서는 자유를 존중하되, 모든 일에서 사랑을 보존해야 한다."(92항)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교회라 하더라도 모든 일에 미리 준비된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진리에 입각한 원칙을 가지고 그때그때의 사안에 대해 식별하여 대처할 뿐입니다.


9. 사회참여의 한계


어떤 사회적 인권 현안들에 대해 교회가 발언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교회 안에는 정반대의 의견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교회가 사회적 발언을 해나가야 한다고 하는 신자들은,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너무 신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물론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이 말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교회가 너무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거나 심지어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깔려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교회의 사회적 발언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신자들은 교회가 왜 세속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느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교회가 자신의 본래 임무인 선교활동과 신자들의 신심활동 제고에 역량을 집중해도 부족한 터에 사회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좀 과도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박문수
이러한 문제는 사회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사회교리를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관심도 적은 편입니다. 한국교회사 안에서 보면 교회가 사회적 현안을 기피해 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거쳤던 험난한 과정이 우리에게 신앙과 사회생활을 구분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었으니까요. 어떤 이유이든 신자들에게는 교회와 사회, 신앙과 사회참여에 대한 이분법적 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태도는 가톨릭 신앙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형성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질서를 복음화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인데, 이런 일을 교회건물 안에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현재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회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들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할지를 궁금해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해결책은 점차 교리교육에서 사회교리의 비중을 늘리고, 신자재교육 차원에서도 사회교리를 널리 가르치며, 강론의 내용도 사회윤리적인 면모를 많이 드러내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신자들이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여하는 일을 계속 낯설게 느낄 것이고, 심한 경우 교회를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오창익
오래된 문제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답이 있습니다. 보편된 교회이기에,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꼭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고, 교회의 사회참여는 꼭 해야 할 몫을 챙기는 것입니다.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경계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사회참여가 늘 논란이 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교회를 통해 관철시키려고 하거나, 교회에서는 그저 마음의 위로나 적당히 우아한 친교만을 쌓으려는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종교의 본래적 기능 가운데 하나인 영성적 위로나 친교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 중요하기에 어느 하나만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사회참여만 있고, 신앙적 활력이나 영적 깊이가 없는 것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기우
신자들의 사회적 성향 역시 신앙인이라는 입장에서 나타나기보다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견해 역시 다를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분명하게 가르쳐주어야 할 문제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를 더욱 널리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사회적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바라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가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강론, 교리, 재교육 기회 등에서 강조해야 마땅합니다.


10. 인권교육


본지는 '교회와 인권'이라는 올 한 해의 주제를 마감하면서 이번 호에서는 주로 인권교육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관심이나 활동은 결국 교회 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에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인권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비오 11세 교황께서 사회교리를 '귀중한 보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보물을 금고 안에만 넣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앞으로 사회교리교육과 인권교육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서 주교회의나 교구, 또 그 안의 각급 단체들,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노력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문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회교리는 정규 교리교육과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어야 할 교리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져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입교자들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가능하겠지만 신자들에게는 재교육의 차원에서 강론이 유용할 것입니다. 일부 성당에서 미사 끝 무렵에 5분 교리를 하는 것처럼 이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주일학교에서 정규 교과로 편성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초등부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는다면 장기적으로는 교회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사회교리에 입각한 초등부 주일학교 인권교재, 중고등부 주일학교 인권교재를 편찬하는 것을 제안해 봅니다. 사회교리 안내서도 현재는 딱딱한 책들뿐인데, 만화, 비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보는 것도 제안해 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움이 되리라고 보는 것은 대희년 준비를 몇 년에 걸쳐 하였던 것처럼 그 후속 작업으로 향후 몇 년간에 걸쳐 천천히 교육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10년은 걸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창익 
그동안 교회가 했던 노력을 계속해 나가되 좀 더 노력하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가 인권운동가, 또 사회사목 활성가라고 불러도 좋지만, 이런 분들의 양성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우리 교회에는 매우 중요한 사명인 인권 등 사회사목을 위한 인력, 특히 훈련되고 준비된 인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사람을 키워주지도 않고, 양성도 안 하고,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돈이든 인격적 대우든 간에 제대로 사람대접을 해주고, 역량 있는 운동가, 활성가들이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제대로 일할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복음을 증언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수세적으로 찾아오는 신자들 관리만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합니다. 정말 그랬으면 합니다.


이기우 
현재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사회교리를 더욱 많은 신자들에게 더욱 널리 보급하려는 취지에서, 여러 교구에서 실시되고 있는 사회교리 교육을 다양한 홍보수단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권장하는 한편, 사회회칙을 쉽게 간추린 보급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서 온라인 교육을 받게 할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사회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관심도 충분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사회교리를 알리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