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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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 문제 그대로 둘 것인가(진보정치, 07091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54
조회
211

민주노동당의 회의는 길다. 심사숙고 때문이 아니다. 창피하게도 시간을 지키지 않아 개회가 늦어지기도 하고, 회의 내내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경우도 많다.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는 엘리트적 관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파 갈등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당의 공식직함을 가진 간부가 아니라, ‘정파 테크노크라트’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파가 낳은 폐해는 긴 회의만이 아니다. 이번 경선도 그렇다. 밖에서 볼 때, 권, 노, 심 세 후보의 정책 차이는 크지 않았다. 나이나 성별 등 개인 신상은 달랐지만, 시장만능주의나, 통일, 평화정착 등 주요 의제에서는 비슷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경선에 정파구도가 대입되는 순간 세 후보간의 차이는 분명해졌다. 피아가 분명해진 거다.


경선이 끝나고 승패가 갈렸지만, 기꺼이 승복할만한지는 모르겠다. 정책 때문에 졌다면 정책을 더 가다듬는데 힘쓰겠지만, 정파정치 또는 가문정치로 인해 패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더 많은 역량을 기울여 자기가 속한 정파를 튼실하게 꾸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정파 구도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대 정파에 대해 갖는 감정은 적대감이라 부를만하다. 저쪽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너무 자주 들린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패거리 대 패거리가 부딪힐 때는 다수가 소수를 포용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판이 깨지지 않는다. 다수의 배려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여도 좋다. 그렇지만 당내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속사정은 모르지만, 적어도 경선과정에서 먼저 ‘가문정치’의 전통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은 다수파였다. 다수가 분명한 입장을 갖고 경선에서 특정후보를 밀게 되면, 현실적인 힘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소수파가 갖는 좌절감은 심각한 수준이 된다.


갈등이 깊어지면, 당밖에 나가 표를 벌어오는 일보다는 내부의 싸움에 더 골몰하게 된다. 풍부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이 언론이나 시민사회, 그리고 표를 가진 시민들에게 냉대받는 까닭은 당 내부에 있다. 요즘 트렌드로 이야기하면 ‘정파 갈등이 성장동력을 갉아먹고 있다.’


구태의연한 정파 구도의 폐해는 다른 정파 사람들을 일반화시키는 오류로도 이어진다. 지당한 말씀도 저쪽이 하면 뭔가 정파적 음모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쪽의 잘못은 커 보이고, 이쪽의 잘못은 실수처럼 생각된다. NL은 PD적으로, PD는 NL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고상한 주문으로 해소되기에는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보인다.


정말 생각이 다르면, 그래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면, 당을 쪼개는 것이 맞다. 그게 정직한 태도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손학규부터 천정배까지 함께하겠다는 범여권식 잡탕정당이 아니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당내 정파가 사상이나 실천방도의 차이가 아니라, 일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저 자신들만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친소관계를 바탕으로 묶인 일종의 비밀 정치결사(이너 서클)라면, 당을 살리기 위해 정파를 해소하는 것이 맞다. 정작 다른 생각도 별로 없는데, 생산성만 떨어지고 갈등만 야기하는 정파구도를 계속 이어갈 까닭은 없다.


나는 여전히 민주노동당의 약진 가능성을 믿는다. 대선 공간에서 필승의 의지로 역량을 집중한다면, 당선은 몰라도 지지부진한 범여권을 제치거나 비슷한 수준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지금도 남아 있다. 대선에서의 약진은 내년 총선에서의 대약진으로 이어질 것이다. 교섭단체 구성은 물론, 뭔가 해볼만한 의석수를 확보할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소모적인 정파갈등을 해소하고, 민주노동당이 새롭고도 힘찬 발걸음을 시작할 때만이 가능한 시나리오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로 확실하게 손잡고 함께 가든지, 아니면 당을 쪼개 딴 살림을 차리든지, 둘 중의 하나에만 진보정당의 미래가 있다. 지금 이 모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