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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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게 사람이지만(평화신문, 2014. 5. 25)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6:42
조회
371

평화신문 [시사진단] 잔혹한 게 사람이지만


- 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  2014. 05. 25발행 [1266호] 


경기도 안산의 촛불집회에서 만난 생존자의 아버지는 그저 울기만 했다. 겨우 울음을 참으며 살아 있어서 죄송하단다. 어떻게 찾은 자식인데, 아비는 제 자식이 살아서 죄송하단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살아 있는 게 죄가 되는 세상이다. 


훌쩍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4ㆍ16은 그날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한 달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잡아두고 있다. 어린 청소년들의 죽음은 참혹했다. 아직 청춘이라 부르기도 모자란, 채 피지도 못한 꽃들이 스러졌다. 


국가는 무능했고 무책임했다. 언론은 쓰레기라 불릴 정도다.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그냥 놓아버렸으니 이렇게 원통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처절한 삶의 현장, 아니 죽음의 자리엔 누구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민낯은 끔찍했다. 


상황을 타개하는 지도력은커녕, 슬픈 죽음에 대한 공감조차 보여주지 못한 눈물 없는 대통령의 탓이 제일 크지만, 그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본의 폐선을 들여다 돈벌이를 할 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3500만 원을 더 벌려고 과적을 서슴지 않을 때도 단속의 손길은 미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뻔히 보이는 아이들을 왜 구하지 않고 외면했는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공범이었다. 돈과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에 아예 무관심했던 우리 자신의 탓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에다 잔혹했던 적은 없었다. 모든 게 다 무너진 느낌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은 잔혹하고,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존재다. 그래서 참담한 고통을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잔혹한 짓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공감의 능력도 지니고 있다. 제 피붙이가 아닌데도,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종교도 다른 사람들인데도 마치 제 일처럼 아파하기도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희생에 대해 함께 고통을 느끼는 연민과 연대가 이 잔혹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사람임을 일깨워준다. 잔혹한 고통의 역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잔혹한 순간에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목숨이 걸린 구명조끼를 양보한 비정규직 여성과 고등학생,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며 사지로 뛰어든 사무장과 교사들이 있었다. 잊지 않아야 할 이 사람들 덕에 그래도 우리가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기억하는 힘을 갖고 있고, 또 연대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참혹하지만,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도 없다. 광주대교구의 김희중 대주교는 진도 팽목항 현지에서 “인간의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계시는 가족분들과 더불어 있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다”고 했지만, 함께 있는 것은 가장 큰 위로이고, 또 동시에 우리가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도에서 시신을 정성스럽게 수습해 준 광주대교구 상장례봉사자회 회원들은 우리 모두의 은인이기도 하다.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우리가 사람임을 확인하며, 새로운 출발을 모색할 수 있다. 물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중요한 일이겠지만, 함께 아파하고, 기억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게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참담한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우리 공동체를 새롭게 만드는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될 가능성도 함께 열려 있다. 바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