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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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그림 속 CCTV, 인권을 '과외'하다! (프레시안 7.6)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1:42
조회
555

[프레시안 books] 조효제·이부록·안지미의 <세계 인권 선언>



이부록, 조효제, 안지미가 함께 만든 <세계 인권 선언>(프롬나드 펴냄)을 처음 받아보곤 잔뜩 긴장했다. 한눈에 봐도 그림책인데, 그림에 대해 뭐라도 언급할 만한 안목이나 실력이 내겐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미술 성적도 형편없었다. 국·영·수와 달리 미술, 음악 등의 교과는 그런대로 좋은 점수를 주는 입시 위주의 제도권 학교의 학생이었는데도 그랬다. 뭐가 좋은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음악과 달리, 미술은 아무리 봐도 뭐가 좋은 작품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두꺼운 도록들을 살펴보고 깨알 같은 글씨의 해설들도 제법 읽었던 것 같은데, 안목 같은 건 당최 생기지 않았다. 일종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세계 인권 선언>은 화가 이부록, 인권학자 조효제, 그리고 아트디렉터 안지미가 함께 만든 책이다. 이부록과 안지미가 그림을 맡았고, 조효제는 선언문을 번역했고 간단한 설명과 참고도서 목록을 넣었다. 서문은 조효제가, 작가 후기는 이부록이 썼다. 작가 후기를 썼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조효제의 기초 작업을 바탕으로 한 이부록의 책이다. 이부록.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면서 설치, 디자인, 뉴미디어, 출판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는 '시각이미지 생산자'다. 시각이미지 생산자의 책, 곧 그림책을 앞에 두고 나는 지레짐작으로 잔뜩 얼어붙었다.


역시 답은 책 속에 있었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한 장의 그림과 세계 인권 선언의 본문과 각 조문들을 찬찬히 보고 또 읽으면서, 나의 지레짐작이 얼마나 어설픈 것인지 금세 깨달았다. 어떤 독자들은 그림보다는 세계 인권 선언이 주는 무게 때문에 괜히 위축될 가능성도 있다. 지레짐작 말고, 그저 예쁜 그림책을 보는 것처럼 편하게 훑어봐라. 아예 드러누워서 보는 것도 좋다.


이부록은 나 같은 미술 문외한도 한번쯤은 봤을 법한 익숙한 그림으로 세계 인권 선언을 쉽게 풀어주고 있다. 때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의 비례'나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 인터넷 공간에서 가볍게 쓰는 이모티콘 같은 여러 상징과 도형들을 통해 세계 인권 선언을 표현하고 있다. 익숙하니 편안하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상징도 여럿이지만, 익숙한 그림은 글로만 된 건조한 선언문에 새로운 활기, 그리고 뭔가 당장 손앞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생활의 자유(제12조)에서는 신윤복의 유명한 '단오도(端午圖)'를 펼쳐놓았다.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네들을 훔쳐보는 승려의 자리에 CCTV 카메라를 뒀다. 신윤복의 해학에 이부록의 해학을 보탠 재미는 물론이고, 단박에 사생활의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고 있다.


국적을 가질 권리(제15조)에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유명한 장면을 담았다. 왼쪽에는 일장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은 '기테이 손'이, 오른쪽에는 태극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은 '손기정'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한 장의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와 약간 비틀어 보여준다. 익숙한 이미지인데도 생각할 거리는 많아진다. '국적을 가질 권리'가 왜 세계 인권 선언의 본문 30개 조 중에서 한 대목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조문인가도 쉽게 알려준다.


표현의 자유(제19조)는 한국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때 길거리에 붙여졌다가 유명한 '쥐벽서 사건'으로 비화되었던, 쥐가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 그림을 담았다. 그 밑에는 미키마우스가 삽질을 막 시작하려는 듯 삽을 들고 있는 그림, 오른쪽에는 '톰과 제리'의 제리(쥐)가 누군가를 두들겨 패려는 듯 망치를 들고 있는 그림, 다시 그 밑에는 누군가를 감시하는 눈이 달린 알파벳 G 옆에 마우스(mouse, 쥐!)를 붙여 놓은 그림을 배치했다. 이를테면 쥐 연작 시리즈다. 집권 세력의 인권 탄압을 4장의 그림으로 풀어냈다. 한 눈에 쏙 들어온다.


다른 조문에서도 광화문의 '명박 산성',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등 익숙한 그림, 그러나 뭔가를 들려주는 듯한 그림이 잇따르고 있다. 이부록의 그림은 이렇게 세계 인권 선언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왜 하필 그림일까.


세계 인권 선언은 인류의 중요한, 그리고 바람직한 자산이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공포된 이후 신생 독립국의 헌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숱한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인류 문명 국가들의 오랜 토론과 합의를 거쳐 나온 문건이기에 보편적 상식이 무언지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온 지 60년을 훌쩍 넘긴 이 문헌은 고리타분해 보이다. 일상적인 언어가 아닌 법률용어로 되어 있는데다가, 한국어 번역문은 일제시대에 법학 공부를 한 게 틀림없으며 성격마저 고집불통인 어떤 남성의 것처럼 여겨진다. 찬사도 많지만, 쉽게 읽기 어렵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대목도 많다. 한두 번 나갔다 질려서 가지 않게 된 교회에서 받은 두꺼운 성경책처럼 멀리 하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 인권 선언은 짧은 문장에 다양한 인권 쟁점들을 담다 보니, 해석이 필요한 추상적인 단어만 나열되어 있다. 그리 친절한 문건이 아니다. 세계 인권 선언이 조효제가 <인권을 찾아서>(조효제 지음, 한울 펴냄)에서 소망했던 것처럼 '야전 교범'의 역할을 하려면, 보다 적극적인 해석과 적용이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건조한 단어의 나열뿐인 선언문만으로 해석과 적용까지 챙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접근할 방도가 확실하고 그 의미도 새길 수 있으며 해석과 적용까지 가능하다면, 세계 인권 선언은 야전 교범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보거나 배운 적도 없고 알기도 쉽지 않은데, 금과옥조라는 찬사만 쏟아진다고 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부록의 그림과 함께 한 <세계 인권 선언>의 쓸모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에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만, 보는 사람의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미술이 가진 장르적 특성일 게다. 이부록의 그림도 그렇다. 이 그림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작가의 의도보다 훨씬 더 많은 인권의 현실과 만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작가보다 더 풍부한 상상을 할 수도 있다.


보통은 프라이버시 등 인격권이라고도 부르는 초상권만 해도 그렇다. 초상권은 개인의 평온한 삶, 명예 등을 위해 꼭 필요한 권리지만, 이를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으로 정리한 조문은 없다. 그렇다고 그런 권리가 없는 것도, 보장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초상권이 필요한 독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조문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헌법에서는 제10조의 '존엄과 가치'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라면 제1조의 '존엄과 권리' 쯤에서 찾아내야 한다. 모호하다. 존엄과 가치 같은 추상적 단어에 기댄다면, 초상권만이 아니라 어떤 인권 문제든 근거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헌법이나 세계 인권 선언이 무기력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야전 교범'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해석과 적용'을 얼마나 확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림은 글과 다른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린 사람의 의도를 넘어 보는 사람이 해석과 적용의 범위를 거의 무한대로까지 넓힐 수 있다. 그래서 세계 인권 선언을 그림책으로 다루겠다는 발상은 놀랍도록 인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그림이기에 해석과 적용의 여지가 더 풍부해진다. 법률가는 그저 조문 그대로만 해석하려고 한다. 법률과 판례의 틀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넘어서는 법률가는 거의 없다. 간혹 개인적인 자질이 있어도, 완고한 법조계는 받아주지 않는다. 정치인은 그보다는 좀 더 유연하지만, 역시 조문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예술가는 조문에 대해 그리는 그 순간에도 조문을 훌쩍 넘어선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조문을 재구성하고 조문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불친절하고 너무 간략해서, 결국은 '해석과 적용'이 관건일 수밖에 없는 세계 인권 선언이 그림을 만나 그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미지가 글보다 더 분명하게 내용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


게다가 <세계 인권 선언>은 한눈에 보기 편하고 실린 글이 많지 않아 금세 읽을 수 있다. 한번만 읽고 말 책이라면 책값이 아까울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옆에 두고 짬짬이 들여다 볼 책이다. 아무 곳이나 펼쳐 눈길 닿는 대로 보거나 읽으면 그만큼의 새로운 상황과 만날 수 있다. 그림을 붙여 놓으니, 무겁게만 느껴지던 세계 인권 선언도 하늘로 날려 보낸 비둘기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이제야 제대로 된 야전 교범을 얻은 느낌이다.


<세계 인권 선언>은 마치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 이제 편한 마음으로 이 책을 봐. 이 책을 보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어도 상관없어. 가끔 어려운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그림으로 쉽게 풀어주니까.


너는 인류 역사상, 단 한번 뿐인 귀한 삶을 살고 있어. 그래서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가치 있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 당연히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러기 위해선 이런저런 권리들을 당연히 누려야 해. 네가 갖고 있다지만, 아무도 네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잖아. 이 책은 달라. 함께 살펴보자구. 인권은 네 것이지만, 네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권리의 폭도 달라질 거야.


해석과 적용이 문제지만, 그리 어렵진 않아. 이 책에 실린 그림을 봐. 세계 인권 선언 제25조에선 의식주, 의료, 사회 복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림은 집안에서 동냥하는 사람 여럿을 그려 놓았잖아. 그 그림을 갖고 네 맘대로 생각해 봐. 생각의 폭을 넓혀서 네가 사는 집으로 옮겨볼까. 네가 사는 집은 반지하잖아. 그래서 여름철 햇볕이 드는 시간도 겨우 한 시간 남짓. 창문을 자주 열어도 눅눅한 건 어쩔 수 없잖아. 보통은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햇볕 잘 드는 집으로 이사를 할 만 한 돈이 없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세계 인권 선언>을 다시 읽어봐. 거기에는 네가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체념했던 문제에 대한 답이 들어 있어. 찬찬히 읽어봐. 제25조야.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에는 음식, 입을 옷, 주거, 의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사회 서비스 등을 누릴 권리가 포함된다."


자, 이번에는 네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 대한민국의 헌법을 볼까. 아까도 살펴봤던 제10조를 다시 봐.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그랬지. 그럼 이제는 그 다음 조문을 봐.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잖아. 그것 봐. 주거권은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이야. 그러니 국가는 국민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해. 인정한다는 거지.


그런데 인정하는 데서 멈추는 게 아니야. 국가에게는 그것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거야. 네가 반지하 방에서 나와서 햇볕 잘 드는 집에서 사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거야. 그러니 '기본적' 인권이지. 그 권리는 국가가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어.


자, 너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제대로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또 한국의 헌법에 따르면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거야. 모든 게 다 네 잘못은 아니야. 이제 용기를 가져. 그리고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한번 제대로 묻자구. 마침 대통령 선거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