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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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경찰·국회 합작품 ‘경범죄처벌법’ (경향신문 4.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1:38
조회
454

경찰은 집요했다. 숙원사업이라며 주취자보호법 제정이나 경범죄처벌법 개정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경찰관이 폭행당하고 업무가 마비된다고 했다. 그래서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경찰관에 대한 폭행이나 기물파손, 공무집행방해는 물론, 욕설이나 명예훼손도 어김없이 형사처벌을 받는다. 


경찰이 겨냥한 사람들은 아무 범죄행위 없이 다만,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었다. 귀찮게 구는 건 범죄가 아닌데도 경찰은 체포와 구속을 대책으로 생각했다. 경찰의 로비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국회는 멍청했다. 경찰의 요구를 100% 받아들여 경범죄처벌법 전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관공서에서 술에 취해 시끄럽게 구는 사람은 벌금 60만원 이하의 처벌을 받게 했다. 형사소송법의 구속이나 체포의 기준이 50만원 이하이니, 경찰관이 술에 취했다고 지목하거나 시끄럽다고 여기면 현행범 체포도, 심지어 구속도 가능하게 했다. 여기에 붙여 단순한 구걸행위도 처벌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여야, 진보 보수가 따로 없었다. 재석 167석에 찬성 166명, 모두 한통속이었다. 2012년 2월25일의 일이다.


시민의 일상을 겨냥해 경찰권의 칼을 들이대는 경범죄처벌법의 독소조항들도 여전하다. 겨우 ‘굴뚝청소 소홀’처럼 굴뚝 자체가 사라져 처벌의 실익이 없는 몇 개의 조문만 빠졌을 뿐이다. 여전히 시장에서 물건을 사라고 권하거나 떠들썩하게 손님을 불러 모아도, 큰 소리로 시끄럽게 해도 처벌받는다. 뭐가 큰 소리고 시끄러운 소리인지는 경찰관만이 판단한다. 문신을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도 처벌받는다. 경찰관의 자의적인 판단만으로 시민의 일상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만드는 한심한 인권침해지만, 법률에 명확한 근거가 있으니 합법이다. 


일제의 공포 무단 통치도 합법이었다. 일제는 사지를 형틀에 묶고 발가벗긴 볼기를 치는 야만도 합법으로 둔갑시켰다. 태형을 칠 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물에 적신 천으로 입을 막은 것도 합법이었다. 조선태형령(1912년)과 그 시행규칙이 근거였다. 


시민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처벌 대상으로 삼은 것도 합법이었다. 경찰범처벌규칙(1912년)이 근거다. 이곳저곳을 배회하거나 구걸을 해도 처벌했다. 질서는 핑계였고, 조선 민중을 닦달하고 족치는 게 목적이었다. 잔뜩 겁을 줘 통치하기 쉬운 백성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속셈이다.


1954년 국회는 경찰범처벌규칙을 폐지하고 경범죄처벌법을 제정했지만, 놀랍게도 법 이름만 바꾼 똑같은 내용이었다. 시민의 일상생활에까지 경찰권을 개입시켜 닦달하고 족치는 건 그대로였다.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이름만 바꾼 것처럼, 악법은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식민지 백성은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주권자는 아니었다. 그저 국가가 원하는 질서를 위해 순응하지 않으면 처벌 받는 계몽의 대상,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60년 동안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매년 10만명쯤 되는 시민들이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형사처벌을 받는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처럼 법질서 확립 어쩌고 요란할 때는 금연 장소 흡연과 쓰레기 무단투기를 집중 단속해 30여만건의 단속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여럿이 함께 사는 세상이니 기초질서는 필요하다. 그렇다고 기초질서 위반을 인신구속까지 이어질 수 있는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이며 대표적인 형사 과잉이다. 기초질서는 무단 주차의 경우처럼 자치단체에서 과태료를 부과하는 행정벌로도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 


국회의원 선거 운동이 한창이다. 좋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경범죄처벌법 같은 악법이 폐지되길 바란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