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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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적 발상, 광화문광장 개발 (경향신문, 2019.01.24)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2-22 16:29
조회
606

[오창익의 인권수첩]19세기적 발상, 광화문광장 개발파리를 들었다 놓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였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지만, 삼촌 나폴레옹 1세의 후광 말고는 달리 설명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리가 프랑스의 심장이라며 ‘파리 대개조’라 불리는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 동안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좁고 굽은 골목길은 넓고 곧게 바꿨고, 상하수도까지 말끔하게 손봤다. 핵심은 보나파르트 왕가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차로마다 자기 동상을 세우고 그 중심에는 삼촌의 위업을 과시하는 개선문을 두었다. 곧게 뻗은 길은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보는 것 같은 바리케이드 시가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민중들의 시위에 대응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게 속셈이었다. 파리 대개조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는 파리에서 쫓겨났고 부르주아만의 도시가 되었다. 물론 지금의 파리는 아름답다. 파리 대개조의 후속 작업이 20세기 초까지 이어졌기 때문이고, 작가만이 아니라 문화부 장관으로도 탁월했던 앙드레 말로 등의 부단한 노력이 함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도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쥐고 있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 사람은 뭔가 근사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서울도 그렇다. 산업화 시대의 서울시장 중에는 별명이 ‘불도저’였던 사람도 있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직전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한강에 인공섬을 띄웠고, 광화문광장을 개발했다. 오세훈의 전임 이명박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광장을 만들어 잔디를 깔고 청계천 공사로 자신의 대선 출마를 위한 가도를 깔았다. 겨울철엔 스케이트장으로 쓰는 서울광장도, 오세훈이 만든 광화문광장도 그렇다. 급한 일이 전혀 없었는데도 서울시장들은 마치 뭔가 홀린 사람들처럼 일을 재촉했다.


아고라 때문에 광장은 흔히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나, 대개의 광장은 권위적 통치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독재자들이나 별로 민주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에 집착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었지만 군사독재시절의 여의도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5·16광장’은 박정희의 군사반란을 기념하는 광장이었다. 200만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쓸모는 관급 반공궐기대회였다.


촛불집회 같은 역사적 사건이 도드라져 보여서 그렇지, 사실 광화문광장도 시민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광장은 오히려 시민들을 동원하는 권력의 공간이었다. 광장에 많은 시민을 모을 수 있는 힘을 시민들이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실에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만이 가능한 일이다. 월드컵 축구 중계나 유명한 아이돌 공연, 또는 그들이 ‘국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행사를 치를 때를 제외하고, 광장은 그저 순찰을 도는 경찰관들이나 소수의 관광객들만의 공간일 뿐이다.


광장은 대개 권위주의적 통치의 산물이다. 중국의 톈안먼(天安門)광장은 30년 전 톈안먼사태 때만 잠깐 열렸던 곳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진압한 다음, 광장의 쓸모는 국가 차원의 열병식 따위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호찌민은 위대한 지도자였겠지만, 그가 묻힌 주변은 그저 공산당만을 위한 광장이 되었다. 베트남의 여러 성취는 놀랍지만, 집회와 시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은 말할 것도 없다. 인민들이 광장에서 멋진 춤을 추며 놀기도 하지만, 그건 북한식 집단주의 원리처럼 하나가 전체를 위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20세기 산물이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광장은 모두 19세기의 나폴레옹 3세가 건설한 저 위대한 파리의 방식을 좇았다. 널찍한 광장,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공간, 그리고 일상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싶은 권력의 욕구가 함께하는 광장은 20세기에 만들었든, 심지어 21세기에 만들든 모두 19세기적 발상일 뿐이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을 지금보다 3.7배나 넓히겠다는 서울시장 박원순의 발상은 생뚱맞다. 국가상징공간이니 잘 가꾸겠다면서도 설계작품의 이름은 ‘딥 서피스’란다. 굳이 번역하자면, ‘깊은 표면’인데, 책 제목 ‘오래된 미래’처럼 기발하거나 가치지향적이지도 않은 그저 멋 부리기에 불과하다.


오세훈이 새로 개발한 광화문광장의 준공식이 열린 건 2009년 8월의 일이다. 10년도 안되어 광화문광장을 다시 뒤집어 버리겠다는데, 그래야 할 절박한 사정은 어디에도 없다. 오세훈은 광화문광장 공사를 1년2개월 만에 끝냈다. 박원순도 내년에 공사를 시작해 그다음 해인 2021년에 완공하겠단다. 시장 임기를 마치기 전에 속도전을 하겠다는 거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광장을 넓히고 새로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자원 낭비다.


이젠 더 이상 서울을 광장 따위로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정작 비교해야 할 것은 서울시민들의 삶이다. 서울시민이 얼마나 인간답게 사는지가 핵심이어야 한다. 책방과 도서관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미세먼지와 폭염에 고생하는 시민들의 건강권은 어떻게 보장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쿠바 아바나에서 식량난을 극복할 때 했던 것처럼 가능한 모든 곳에 나무를 심어 미세먼지 농도를 조금이라도 낮추고, 여름의 열기를 다만 2~3도라도 낮추는 노력이 시급하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도시가 도시민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박원순은 변했다. 이런 이야기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일에든 반대는 있기 마련이라며 간단히 퉁 치고 넘어갈 정도로 배포도 커졌다. 얼마 전 인터뷰에선 자기 정치를 하는 게 나쁘냐고 되묻기도 했다. 제발 박원순은 박원순다워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특장을 지워버려서 이제는 박원순다운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대선에 나가고 싶어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삽질을 잘해서 얻어지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명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박원순이 왜 이명박의 길을 따라가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