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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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위한 정치. 유방백세 정치인 (경향신문, 2020.04.2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4-24 09:54
조회
572


 

유권자들이 만들어 준 결과만 뺀다면, 이번 총선은 엉망진창이었다. 무엇보다 기억할 만한 공약이 없었다. 이 당이든 저 당이든 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건지, 다수당 또는 과반수가 되면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다만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둘로 쪼개지는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이 일할 수 있으려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려면 미래통합당을 찍으라는 게 전부였다. 둘로 쪼개진 세상에서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의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민주당은 통합당만큼 엉망은 아니었지만, 변변하게 내세울 게 없었다는 점은 같았다. 둘 중 하나만 강요하는 게 선거판의 속성이라지만, 내일을 위한 건설적인 대안 제시는 온통 MB식 개발공약에만 머물렀다.


막말은 차고 넘쳤다. 김대호, 차명진의 이름을 다시 거명하는 건 뜨악하다. 차명진의 막말도 문제였지만, 통합당의 대응은 한심했다. ‘자진 탈당’이란 뜨뜻미지근한 조치를 했다가 여론에 밀려 제명을 했다. 막말을 이유로 김대호를 제명한 직후인데도 그랬다. 아마 길거리 태극기를 의식한 탓일 게다. 황교안이 그랬던 것처럼 통합당이 길거리 태극기로 기울어질수록 민주당의 승리는 더 확실해졌다.


차명진의 막말이 도드라졌지만, 도대체 저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 어떡하나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입신양명 말고는 어떤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후보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전 국민에게 1억원씩 주겠다는 등 선거판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도 적지 않았다.


비례용 위성정당이라는 부끄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통합당은 선거법 개정 국면에서도 몽니를 부린 터라 그러려니 하지만, 원칙을 지키겠다던 민주당마저 ‘꼼수와 편법’을 쓴 것은 실망스러웠다. 적어도 국정운영을 책임진 정당으로서, 특히 지난해 선거법 개정을 이끈 정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은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러지 않았다. 역사적 압승이지만, 색이 바랬다. 그나마 민주당이 뭘 잘해서 얻은 성적이 아니라, 상대의 자멸로 얻은 반사이익이었다.


표를 달라면서도 수준 낮은 정당과 자격 미달의 후보들도 많았지만, 유권자들은 현명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그것도 아니면 최악은 면해야 한다는 주권자의 지혜로운 판단을 직접 표로 보여줬다. 집권 3년째 정권이 아니라, 시대착오적 수구세력을 심판한 것도 놀라웠다. 통합당을 심판하되, 환골탈태하면 다시 도약할 수 있을 정도의 여지는 남겨 두었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다음 선거 때는 아예 소멸시켜버릴지 모른다는 경고도 함께 보여주었다. 정의당 대표는 울었지만, 정의당의 비례 득표율은 지난 총선에 비해 2.4%포인트 이상 늘었다. 제3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것도 바로 유권자의 선택이었다.


다들 아는 것처럼 문제는 지금부터다. 적폐를 어느 정도 청산했다지만, 21대 국회라고 녹록지는 않을 거다. 국회의원 당사자들은 대개 엇비슷하다. 다양한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다. 50대 중반의 직업 정치인 아니면 법조인이고, 재산도 엇비슷하다. 너무 한결같다. 세대를 아우르지도 못하고, 다양한 직업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남성은 너무 많고, 여성은 너무 적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관료들을 견제하며 뭔가를 바꾼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 정치는 지독한 정체 상태다. 그저 직업이 정치인인 사람,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 출세 한번 하고 싶은 사람들만 잔뜩 모였으니, 새로운 기대 자체가 무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의 관심은 온통 국회로 쏠릴 수밖에 없다. 직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다양성의 측면에서 한국적 해법은 세계 각국의 찬사를 받았다.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 민주당의 총선 승리도 코로나19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한국은 불과 몇 년 전까지 헬조선이라 불렸다. 긍정적인 변화도 제법 있지만, 요지부동인 것도 아주 많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낮은 출산율은 한국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준다. 자살이라는 사회적 바이러스는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리지 않는다. 김용균의 비극에도 산업재해는 끝없이 반복된다. 현대중공업 같은 대기업에서도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상황은 참담한데 정부와 국회의 역할은 잘 보이지 않는다.


국회의원 박용진의 말처럼 지금 여당이 할 일은 대선공약집을 꺼내 보는 것이다. 당선 인사는 이제 그만하고 일을 해야 한다. 모여서 공부도 하고 어떤 상임위원회에서 일할지, 4년을 어떻게 보낼지 구체적으로 가늠해야 한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만큼 헌법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역대 최고의 사전투표율, 그리고 전체 투표율은 4년을 기다린 유권자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느 때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21대 국회 개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도 엉터리라면, 그때는 심판 대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민주당이 야당 복 때문에 누리는 호사도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이제는 자기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이 코로나19 대응으로 세계적 모범국가가 된 것처럼, 한국 정치의 수준도 달라지면 좋겠다. 오로지 국민을 위한 정치, 국민에게 인정받는 정치를 하자. 새로운 국회에 거는 시민들의 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