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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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애 인권위원장의 자질을 묻는다 (경향신문, 2020.02.2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2-28 10:51
조회
632

[오창익의 인권수첩]최영애 인권위원장의 자질을 묻는다


당사자들은 절박했다. 그제 국가인권위원회 앞.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구제조치를 요구했다. 폐쇄병동에서 집단 격리, 집단 치료는 곤란하다는 거다. 시설 수용자도 다른 환자들처럼 안전한 치료대책을 마련해달라는 거다. 상황은 엄중하고 요구는 절박했지만 인권위는 아직까지 입장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건강권’에 대한 중요한 현안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주문은 많았지만 인권위는 능동적 대처, 원활한 해결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가를 빌리면 “침체하고 존재감이 없었다”. 그럼에도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리는 건, 인권위가 뭔가 해줄 수 있는 법률적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긴급구제조치 권고를 통해 수용자의 구금 또는 수용 장소의 변경 등 필요한 사항을 권고할 수 있다.


인권위는 김대중 정부 시기였던 2001년 11월 출범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논란의 한복판에서 주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 의견 표명이 대표적이다. 대통령 입장에선 성가신 존재였다. “정부의 인권 침해 사례를 적시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결정이 빈번했다. 그 호통이 때로는 날카롭고, 자못 난감한 경우가 있었지만 나는 싫지 않았다.” <김대중 자서전>의 한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다운 말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조직 축소와 위상 격하를 겪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금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되었다.


당장 인력과 예산이 부쩍 늘었다. 예산은 2018년 314억원에서 2019년 366억원으로 늘었다. 16.8% 급증이다. 인건비도 14.4% 늘었고, 주요 사업비는 무려 38.3% 증가했다. 국가기관의 예산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늘어난 사례가 또 있을까. 호시절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인권위 위상을 제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전 정부의 인권 경시 태도와 결별하고, 국가의 인권 경시 및 침해를 적극적으로 바로잡고 인권이 실현되는 국정운영을 도모하라는 거다. 이명박 정부 때 형식화되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 건도 없었던 인권위 특별보고도 정례화하겠다고 했다. 국가기관이 인권위 권고를 잘 따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약속은 대체로 지켜지고 있다. 비록 정례화는 아니지만, 2017년 12월, 2019년 4월에 대통령 특별업무보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인력과 예산을 늘려 인권위의 힘을 키운 게 중요했다. 인권위는 모처럼 중흥기를 맞았지만, 좋은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호시절이 허송세월이 되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고, 내부는 온통 어수선하다. 직원들은 기운 빠져 보이고 고위직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의 기자회견이 이례적일 정도로 인권위가 여론의 주목을 받는 경우도 별로 없다.


인권위의 답답한 모습은 웹사이트만 찾아봐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위원장 활동’은 2019년 9월에 멈춰 있다. 그날 종교인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는 게 마지막이다. 다른 기관도 이럴까. 국민권익위원회를 봤다. 권익위 웹사이트는 위원장 동정을 아예 달력으로 보여준다. 2월 일정은 여백이 별로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이게 공직자의 도리고 기관의 기본이다. 인권위원장의 활동이 5개월 동안 멈춰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신호다.


국가기관에서 인력과 예산, 그리고 권한이 늘어나는 것처럼 신명 나는 소식은 없다. 그런데도 왜 인권위는 이전 정권 때처럼 침체하고 존재감이 없는 걸까. 내부 평가는 최영애 위원장의 자질을 주목하고 있다. 인권위 노조의 설문에 따르면 직원의 64.2%는 최 위원장이 핵심과제에서의 성과가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긍정평가는 겨우 4.9%였다. 인권위가 핵심과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로 ‘위원장의 역량 등 리더십 부족’을 꼽은 사람은 54.1%였다.


최영애 위원장은 인권위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다. 설립준비단 시절부터 사무처 준비단장을 맡았고, 초대 사무총장을 거쳐 상임위원으로 영전했다. 설립 초기 6년 동안 인권위의 정점에 있었다. 2018년 9월 위원장에 취임했다. 사무총장, 상임위원, 위원장 등 핵심 요직을 모두 거친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최 위원장에 대해 자질이 없다고 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구체적인 쟁점으로 들어가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인권위는 최근 법무부 교정본부로부터 기동순찰팀 대원들의 명찰 패용 권고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원들이 수용자로부터 협박, 진정, 고소·고발을 당하기 때문이란다. 교정본부가 책임행정의 기본도 지키지 않겠다는데, 인권위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다.


진짜 문제는 명찰 패용이 아니다. 무술 유단자 등으로 구성된 기동순찰팀은 2009년 ‘수용질서 확립’을 위해 만들어졌다. 정권 환경과 인권에 관심 없는 법무부 교정본부장의 일탈이 만들어낸 권위주의적 산물이다. 기동순찰팀의 역할은 일상적 무력 과시가 전부다. 인권위라면 마땅히 기동순찰팀 해체를 권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엽적인 명찰 문제에만 매달렸고, 그마저 퇴짜를 당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퇴짜를 당하고도 아무 반응이 없다는 거다.


권위가 땅에 떨어진 엄중한 상황이지만 인권위가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토론회를 열 수도 있고, 언론 기고를 하거나 기자간담회를 통해 여론에 호소할 수도 있다. 법무부 장관을 만나 자초지종을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뭐가 되었든 인권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반복되고 있다.


위원장이 조직 장악도 못한다는 평가가 따르는데, 사무총장에도 낙하산 인사를 강행했다. 위원장과 사무총장은 고위직으로 근사한 대접을 받아서 좋겠지만, 그들에게 좋은 게 인권위에도 좋은지, 나아가 국민들에게도 좋은지는 의문이다. 최영애 위원장의 임기 절반이 훌쩍 지났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오늘도 어제처럼 별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