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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잊혀질 권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1-27 17:50
조회
325

이회림/ 00경찰서


 2020년 10월,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 창밖으로 커다란 배롱나무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택배 기사님이겠거니 하고 반갑게 받았습니다.


 “네, 여보세요?”
 “하하, 오랜만이네요. 접니다.”


 모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 누구신데요?”
 “아~ 내 번호 삭제했나보네~ 하하, 000기자입니다.


 2013년, 나름 정의로운 기자로 유명세를 날리던 A기자. 배롱나무 덕분에 즐거웠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택배 기사님들을 응대할 때와 180도 다른, 퉁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네?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아~ 이형사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한 번 전화 해봤죠~ 잘 지내시나요? 나영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머릿속에 전구가 번뜩하고 켜지는 느낌입니다.


 ‘아하! 조두순 출소가 얼마 안 남으니 날 이용해서 기사 하나 쓰고 주목 받고 싶어서 이러는 구나, 으이구~ A기자 아직 정신 못 차렸군!’


 저는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일단 대답은 해줍니다.


 “하이고~ 참내, 잘 지내긴 하는데요, 기자님 전화 하나도 안 반가운데요? 마지막 통화가 5년 전인가? 그 때 기자님하고 굉장히 안 좋게 대화하다가 결국 연락 안 하게 된 것 기억 안 나세요? 설마 그 대화들이 전혀 기억 안 나셔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하신 거예요? 그리고 나영이요? 나영이 소식을 왜 물어보세요, 갑자기? 아~~ 알겠어요. 또 누가 옆에 계셔서 옆 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전화하신 건가요? 전에도 그러시는 것 같더니 또 그러시네요~ 근데 5년 전 대화가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세요? 거참~”


 그 당시의 황당한 감정이 저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다가 울컥 올라 왔나 봅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라고 소리를 치고 끊고 싶었으나 그 말만은 참았습니다.


 “아니~ 그때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A기자 특유의 ‘다짜고짜 반말’이 흘러나옵니다. 문자와 전화로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시정요구까지 했음에도 전부 무시하던 A기자. 정식으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지만 엄마의 암투병에 집중하고 싶어서 마음을 비웠던 그때 그 시절 황당한 일들이 기억 속에 생생한데 말이죠.


 2013년 여름, 저는 A기자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마치 연예인처럼 메이킹된 이미지만을 신뢰한 나머지 나영이와 나영이 언니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영이 아버님으로부터 정신과 치료를 해주실 의사선생님을 연결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터였습니다. 저보다는 인맥이 넓어 보이던 A기자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A기자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며 아무도 연결해 주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저는 더이상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급히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지 하루 만에 무료로, 비공개로 치료해주실 분을 찾아냈습니다. 그 의사선생님들은 저를 직접 만나지도 않고도, 전화 통화 몇 번만으로 저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오셨는지 흔쾌히 결단을 내려주셨습니다.


 5년 만에 전화 온 문제의 ‘A기자’는 본인의 ‘잘못’이 뭔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갑툭튀 전화를 일방적으로 했던 거겠지요.


 저는 길게 통화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나영이요? 갑자기 전화해서 나영이요? 참내~ 할 말 없습니다. 끊습니다~” 라며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A기자의 번호를 냉큼 차단하였습니다.


 A기자를 알게 된 건 서울의 모 수사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 5~6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뜬금없이 전화를 해 대놓고 ‘친한 척’을 하고 쉽게 말해 요즘 핫한, 기사 한 번 썼다 하면 검색어 1위에 금방 오르는 ‘나영이’를 물어 오는 그런 희한한 분이지요.


 이런 사람의 마음상태는 도대체 뭘까요? 그리고 비단 A기자 뿐일까요?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는 저서 <잊혀질 권리>에서 '역사가 있은 이래로 인류에겐 망각이 기본값이고 기억은 예외였지만 디지털 기술과 전 지구적 네트워크 때문에 이 구조가 역전됐다'라고 썼더군요.


 2009년부터 나영이네 가족을 만나오면서 이 ‘잊혀질 권리’에 대해 줄곧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어떤 여성 기자에게 혹 ‘미국이나 유럽에서 범죄 피해자들에 대해 기사를 쓰기 전에 직접 허락을 받지 않으면 기사 생성을 아예 못하게 하는 법이나 규약은 없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곤 피해자들의 잊혀질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시스템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조두순 사건이 일어난 2008년 겨울, 저는 관악경찰서 형사과에서 성범죄 피해자 담당조사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산에서 일어난 조두순 사건을 직접 수사하거나 관여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영이와의 인연은 2009년 시작되었습니다. 해바라기아동센터 직원께서 저의 전화번호를 나영이 아버지께 전달하면서였습니다. 저의 지인 중 한 분인 여성 산부인과 의사께서 평생 무료로, 그리고 비공개로 나영이의 진료를 봐주고 싶다고 하셨고 이를 연결해 드리면서 만나게 된 것이었지요.


 200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끔씩 만나, 초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기까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영이가 저를 부르는 호칭은 ‘경찰언니’에서 그냥 ‘언니’로 바뀌었습니다. 저의 부모님 댁인 경주로 계절마다 여행을 가거나, 대학 입학 후에는 나영이 자매와 저, 셋이서 가까운 오키나와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나영이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함께 수다 떨고 놀고 여행을 다녀보면서, 그녀가 초등학생 때부터 어른도 웃기는 번뜩이는 유머감각이 있으며 섬세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친구라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영이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무조건 믿고 따르거나 가볍게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 아니라, 굉장히 강인한 성격이 밑바탕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조두순 사건’을 다루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여러 연예인 패널들이 함께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는 말씀을 계속 하시더군요. 연예인들만 계신 것이 아니라 범죄분야 전문가도 계셨고요.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굉장히 가슴이 답답하고 기가 막혔습니다.


 조두순 출소를 앞두고 다시 떠오른 각계각층의 과도한 관심이, ‘나영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제발 좀 생각하기 바랍니다. 생각을 한 후에 기사를 쓰고 TV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국민의 트라우마처럼 되어 버린 그 사건의 주인공은 조두순이 아니라 ‘나영이’여야하고, 그 사건이 기사화됨으로써 금전적인 이익을 보는 사람은 글 쓴 기자가 아니라 ‘나영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영이를 동정하고 걱정하고 함께 마음 아파하느라 조두순 얼굴의 정면 사진을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하고, 나영이조차 원하지 않아도 그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마주치게 된 이 상황, 여러분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모든 범죄 피해자(생존자)들에 대해서 기자가 글을 쓰고 PD가 프로그램을 만들 때 직접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나영이처럼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과도한 미디어에 노출되고, 이용당하고, 검색만 하면 튀어나오는 가해자의 얼굴을 감내해야 되는 사람이 지금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요?


 피해자(생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람들 앞에서 직접 SPEAK OUT하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의 극복법이라며 나영이가 그런 방법을 써서 극복하기를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망상이고 허구입니다. 본인의 결정으로 직접 책을 쓰거나 연단에 오르지 않는 이상, 나영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기사로, 방송 프로그램으로 상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피해자(생존자)들에게는 2차 가해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학교 2학년인 나영이는 엄연히 성인입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부모님이 아니라 나영이 본인이 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진 출처 - freepik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심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예민하고, 장난스럽고, 강한 희생정신을 지니고 있어, 호기심이 강하며 엄청난 힘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주 직관적이고 자식과 배우자, 그리고 가족을 끔찍이 아끼며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며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리저리 내몰리고 학살당해 왔으며 열등한 존재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늑대와 여성들은 자기들을 오해하는 이들에게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취급을 받아왔다.


 최근에 읽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이라는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저는 범죄 피해자(생존자), 특히 나영이 같은 아동 성범죄의 생존자에게서 ‘늑대’의 기운을 느낍니다. 우리들의 늑대 ‘나영이’는 극한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 앞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조두순’이라는 인물은 어른들이 만든 온갖 더러움과 악함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나영이’는 매우 특별합니다. 부디 특별한 사람만 특별하게 대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조두순’같은 찌질하기 그지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범죄자는, 전 국민이 그 얼굴을 프린트해서 갖고 다니지 않더라도 하늘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할 수 있었고,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은 일’을, 어른들이 상기하기 바랍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이 그렇게 흘러온 것을 어찌하나요?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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