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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법무부가 독서실도 아니고, 매번 과천으로 찾아오라고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5-22 18:20
조회
581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서울의 한 로스쿨에 다니는 김진영씨(26)는 최근 학교수업과제를 위해 법무부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변호사시험 자 료를 찾다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일부 기출문제자료가 한글파일(.hwp 파일형식)이 아닌 사진파일(.jpg 파일형식)으로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전맹 시각장애인인 김진영씨는 평소 시각장애인용 보조기기를 이용하여 공부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파일을 보조소프트웨어를 통해 음성으로 듣는 방식이다. 이 보조소프트웨어는 문서파일(.txt, hwp, doc 등)에서 문자를 인식해서 다시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방법으로 시각장애인의 학업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사진파일은 음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김진영씨는 변호사시험 자료를 제공하는 법무부에 전화로 문의하여 사정을 설명한 뒤 한글파일을 요청했으나 담당 공무원은 “저희가 (김진영씨가) 시각장애인인지 어떻게 확인하죠?”라며 터무니없는 반응을 보였다. 김진영씨가 복지카드로 증명할 수 있다고 대응하자 이번엔 사진파일만 제공받는 비장애인과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었다. "공식홈페이지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올리면 되지 않냐."고 물었지만 담당 공무원은 말꼬리를 흐린채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담당 공무원은 김진영씨에게 전화를 걸어 원본파일을 지워서 제공할 수가 없다는 요상한 변명을 했다. 국가시험 원본파일이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하자, 갑자기 말을 바꾸어 파일을 지우진 않았지만 찾는데 오래 걸리니 기다리라고 답했다. 결국 언제까지 한글파일을 줄 수 있다는 확답은 없었다.


 법무부는 그 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①문제 내용에 개인식별정보가 포함되어 정부 보안 정책상 홈페이지 업로드가 불가능하다, ②수험용으로 가공, 재생산하여 고시학원화할 우려 때문에 한글파일을 업로드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한 향후계획으로 “법무부 방문 시 한글 파일 열람 후 현장에서 보조기기를 통한 녹음 등 원하는 방법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출처 - 법률신문


 물론 법무부가 한글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아예 변호사시험 자료를 공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김진영씨는 여태까지 대학교 및 대학원 수업자료의 문서파일 제공을 거절당하는 경우, 장애학생지원센터 또는 시각장애인복지관 등에 문서화 작업을 맡기곤 했는데, 이 작업은 최소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도 걸린다. 봉사자가 자료를 보며 일일이 타이핑해서 전자문서로 옮기는 고생스러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겐 다운로드 클릭 한 번이면 볼 수 있는 자료. 시각장애인에겐 복지센터에 문의, 봉사자들의 노동, 그리고 최대 6개월간의 기다림 후에야 비로소 사용 가능한 자료가 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0조 1항은 “공공기관은 장애인이 전자정보를 이용하고 접근함에 있어서 장애를 이유로 차별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의 차별행위에는 형식적으로는 동일하게 대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장애인에게 불리한 경우도 포함된다. 하지만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 등이 있는 경우는 면책될 수 있다.


 법무부 측이 주장하는 보안 및 수험용 가공화의 우려가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에 해당할까? 변호사시험 문제에 있는 개인식별정보는 익명화(별표처리)를 거쳐서 업로드하면 그만이고, 안타깝게도 현재 법무부가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 파일들에는 이미 수많은 주소, 연락처, 주민번호, 사건번호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다. 수험가공화가 우려된다면 워터마크를 삽입하거나 수정금지용 문서파일을 제공하면 된다. 둘 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작업이다. 아무리 ‘슈퍼갑’이라지만 잠시만 고민해보면 해결책이 참 많은데, 공무원시험 경쟁률이 40대 1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자료가 필요하면 현장에 방문하라는 법무부의 공식 해결책을 들은 김진영씨는 “법무부가 무슨 독서실도 아니고..”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법무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3조에 따라 차별행위를 하는 자에게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차별 시정도 좋지만 “너나 잘하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새로운 차별행위나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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