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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호] 22년 간의 직장생활이 남긴 것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21 15:46
조회
158
- 엄마는 페미니스트 두 번째 이야기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2017년 12월 31일자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금노동자로 일한 시간을 합해 보니 21년 6개월. 대학 졸업 후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지 않고 쉬었던 시간은 1년 6개월 정도이니 22년 가까이를 어쨌든 밥벌이를 한 것이다. 직장생활 22년이면 뭔가 대단한 통찰을 얻을 것이라거나 높은 직위에 오를 것이라 기대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 시간 동안 출판계에서 일했다. 여러 방향에서 그 경험을 정리해 볼 수 있겠지만, 노동자로서 나의 경험을 몇 가지 들추어본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두 가지 바람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에서 일해보는 것과 내 방(사무실)을 갖는 것. 아쉽게도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운이 나빠 그런 건지, 능력이 안 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녔던 열 군데의 회사 중에 내가 그만둔 뒤에 노동조합이 생긴 곳은 단 곳. 제대로 노사협의회가 운영된 곳은 두 곳이었다. 나머지 회사는 규모가 크건 작건 노사협의회가 (형식적으로 신고돼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또는 회사의 운영에 목소리를 낼 시스템이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출판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나아질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다니던 회사의 노사협의회 노측대표단이 마련한 ‘성평등 조직문화 만들기’ 강연이 있었는데, 강연에 앞서 조직에서 남녀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사전 설문조사가 있었다. 이 설문조사의 답변들이 경영진에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꼭 전달되기를 바란다) 남녀임금격차, 승진에서의 차별,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아래위로 훑어보는 행위, 남자 위주의 경영진 구성 등등이다. 솔직히 남자직원들의 답변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직장생활 8년차쯤부터 나는 후배가 아니라 선배의 위치에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를 갖고 있었고, 여자 간부직원은 단 한 명이었다. 갓 서른을 넘긴 당시에 나는 여자 간부의 존재가 소중하다고 느꼈다. 조직 안에서 여자 간부의 존재는 실무적인 차원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 외에도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자도 승진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라는 점.


 당시 남자 간부직원 몇몇이 부서의 회식비로 단란주점 영수증을 부서 총무를 맡고 있던 막내 편집자에게 처리하라며 넘긴 사실을 알게 됐다. (편집자 후배들은 이 사실을 알면 난리칠 거라고 생각해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루트로 이 사실을 며칠 지나 알게 됐다.) 그 편집자 후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그 후배에게 부서회비는 부서의 모든 직원이 나눠서 사용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몇몇 남자 간부직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직원들에게 아무런 동의도 없이 술집에서 사용한 것을 묵인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후배는 이 문제가 불거져서 부서의 선배인 남자 간부직원과 부딪혀야 하는 상황을 무척 어려워했다. “00아, 우리 사무실을 한번 봐봐. 여기부터 저기까지 몇 십 명의 직원 중에 남자가 몇 명이야?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야. 지금껏 남자중심으로 만들어져서 통용되고 있는 이런 조직 문화와 분위기를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네 후배, 그 다음 후배 여직원이 들어와도 똑같을 거야. 지금 불편하고 닥칠 상황이 무섭다고 피하면 그렇게 돼. 누가 대신 바꿔주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남자 간부직원이 그 비용을 회사에 올리지 않고 나눠서 개별 처리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 경험으로 바로 조직 문화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경험을 당사자와 다른 조직원들이 공통으로 갖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변화는 작은 경험이라도 조직원 전체가 공통으로 가지게 되었을 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직원이 70명이 넘고 매해 한두 명은 육아휴직을 들어가는 회사에 근무하던 때. 매해 두 명 정도는 임산부 직원이 있는 그 회사에는 직원휴게실이 없었다. 생리통으로 몸이 불편해도, 임신 중이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출산 후 복직해서 모유수유 중이라 유축을 해야 하는 상황에도 사무실 의자 말고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비단 여직원을 위한 휴게실이 아니더라도 직원휴게실이 있어야 하는 건 상식적인 노동조건이다. 휴게실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회사 대표는 회사 회의실도 부족한데 왜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제안을 한 지 3년이 지나 그 회사는 더 성장했고 상장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상장에 필요한 조건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올해는 직원휴게실을 만든다고 한다. 긍정적인 변화다. 부디 회사가 직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을 뒤늦게 마련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갖길.


사진 출처 - 구글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일이 아니라 회식 문화다. 첫 직장에서는 단란주점에서 회식을 하는데 남자임원이랑 춤을 추라며 내 등을 떠미는 상급 간부직원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내게 몇 번이나 채근했고 결국 나는 화를 냈고 춤을 추지 않았다. 나이 어린 여직원을 자신의 상급자에게 떠밀다니, 그는 여직원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행위를 상급자에게 충성하는 사회생활의 기본자세라 여겼을까. 견디기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술문화다. 나는 체질상 술이 맞지 않았고 대학 2학년 때부터 거의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그 뒤로는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데도 서너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회식자리에서 원샷, 술잔 돌리기 같은 것은 내게 죽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술을 못 마신다는 내 말은 거의 무시당했고,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만으로 야유와 비웃음과 협박에 가까운 언사를 들었다. 어떤 때는 그래,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지, 하는 마음으로 몇 잔 마시고 인사불성 되어서 회식자리 파토내고 집으로 실려 간 적도 있다. 이렇게 한바탕 눈으로 사실확인을 하고 나면 더 이상 회식자리에서 술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전히 당신은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술자리에 필요도 없고 분위기 망치는 인간 취급을 당했다. 이 정도로 무식한 술자리 문화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기를. 뭔 이런 옛날 얘기를 하나라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이기를.


 지금이 예전보다 나아 보이는 것은, 나이와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태도나 언행을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고, 현실에서 차별에 항의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현실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바뀌더라도 아주 조금 아주 천천히 바뀌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22년 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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