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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호]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말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2-17 14:09
조회
840
인권연대는 저에게 언제나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더불어 난민 출신인 저에게 (장발장)은행장 감투까지 주셔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말주변도 없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실은 스스로에게 항상 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 뜻 깊은 자리에서 같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말일 수도 있는데, ‘회의(懷疑)하는 자’, ‘항상 의문을 품는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권연대가 배움의 장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도 실상 ‘회의하는 자’로서의 제가 인권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성숙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드리게 됐다고 봅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에는 제 외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 중, 제 어린 가슴을 적셨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여러분들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옛날에는 겨울이 참 추웠습니다. 그 추운 겨울날 화롯불을 방에 놓고 외할아버지가 그 당시 초등학생인 저를 앞에 두고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제 외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해주시던 투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옛날에 서당 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다. 어느 날 서당 선생이 삼형제를 앞에 두고 장래 희망을 물어봤다. 첫째가 “나는 커서 정승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암, 그래야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라고 했다. 그 다음에 둘째가 “나는 커서 장군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역시 서당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내에게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하고 물으니, 막내가 잠시 생각하더니 “장래희망은 관두고, 여기에 개똥 3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대답을 하니, 이 엉뚱함에 서당 선생이 “그건 왜 그렇느냐?”하고 물을 수밖에. 그러니 막내가 대답하기를 “나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큰 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저 입에다가 개똥 하나를 넣어주고 싶고, 그 다음에 나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저 입에다가 개똥 하나를 넣어주고 싶습니다. 자, 개똥 하나가 아직 남았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서당 선생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럼, 마지막 개똥은?”하고 물었다.

여기까지 말씀을 하신 외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얘야, 막내가 뭐라고 했겠니?” 저야 당연히, “그건 서당 선생이 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래, 네 말이 맞다. 세 번째 개똥은 서당 선생이 먹어야지. 그런데 얘야, 그건 왜 그런 것 같으냐?”하고 물어보셨고, 저는 “첫째 형하고 둘째 형의 엉터리 같은 대답을 듣고 좋아했으니, 서당 선생이 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런데 얘야,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을 잘 들어라. 앞으로 네가 살아가면서, 지금처럼 세 번째 개똥을 서당 선생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얘기를 하지 못할 때에는 세 번째 개똥을 네가 먹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어린 시절, 작은 가슴을 적셨던 한 에피소드였습니다.

저는 ‘세 번째 개똥을 어떻게 하면 좀 덜 먹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아예 안 먹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적게 먹으려고 하다 보니 난민도 되고, 이런 과정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간부터 일종의 꺼림칙함이 제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무슨 자격으로 이야기 속 첫째나 둘째가 아닌, 막내와 나를 동일시했을까? 그런 자격을 내가 가지고 있나? 나는 글 읽기를 열심히 하는가? 글 읽기보다는 노는 걸 더 좋아하고, 겁도 많으니 오히려 첫째나 둘째와 더 가까운데(왜 막내와 동일시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 다음부터입니다. ‘왜 이 얘기의 주인공은 삼자매가 아니라 삼형제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난민 생활을 하던 제 처지는 이야기 속 삼형제가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지도 못하는 마당이나 쓸던 개똥이 같았습니다.

‘첫째도 아니고 둘째도 아닌, 막내는 더욱이 아닌, 그래서 처지의 변화가 의식과 생각에도 변화를 가져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는 역으로 애기하면 ‘생각에 없는 행동, 인식은 인지하기 힘든데, 그것들이 얼마나 한계 지어져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성찰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계속 경계 바깥의, 생각하지 못한 곳들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예컨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거의 다 주인공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언젠가 영화를 보다가 ‘저 조연은 어떻게 될까?’를 쫓다보니 스토리를 잊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경계 너머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저에게 회의하는 자의 삶을 살게 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말에 ‘짓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말을 참 좋아합니다.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옷을 짓습니다. 제가 아는 외국어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가 다 ‘짓다’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건 우리말 동사 ‘짓다’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잘 지어서 그야말로 아무한테도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제가 ‘짓다’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자기 자신을 잘 짓는 일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어떤 인간으로 지을 것인가는 결국 나한테 달려있습니다. 환경이 어떻고, 주변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나를 어떤 인간, 바라건대 조금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모색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짓는 주체이면서, 짓는 객체로서 하나로 만납니다. 인간이 본디 외로운 것은 그 점에 있다고 생각하고, 또 외로운 만큼 자유로운 존재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로운 존재가 외로울 수밖에 없다보니 집단에 위탁하고, 물질에 귀의하는 모습들을 보입니다. 인권이라는 가치는 그렇게 나라는 존재를 아름다운 존재로 짓고자 하는 각자가 환경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인권적인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서로 북돋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한 인권이 갖고 있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물적 토대라던지 이런 문제도 있겠습니다마는 각종 억압과 차별, 혐오 등의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이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북돋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자신에게 항상 하고 있는 말을 재차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를 더 갖고 싶어 하는 마음, 명예욕이든, 부에 대한 욕망이든, 권력에 대한 욕망이든 이는 전부 소유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욕망을 열정으로 바꾸기 위해 나를 어떤 존재로, 어떻게 가꿀 것인가?’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성,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서로 북돋고 보듬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만나서 너무 기쁘고, 앞으로도 계속 인권연대와 함께하시리라 믿습니다.

생각도 중요하지만 의식이 참 중요합니다. “사람을 볼 때 무슨 말을 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공감 능력을 갖고 있고, 감정이입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실천에 있다.”라는 말이 있죠.

즉 의식보다 중요한 것이 가슴이요, 가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발입니다. 실천의 천(踐)자에는 족(足)변이 있죠. 발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인권연대가 20년이 됐습니다마는, 오늘 이 자리가 앞으로 20년, 40년 간 가는 과정에서 같이 실천하고, 같이 힘을 모으는 새로운 전환, 새로운 다짐의 장으로 거듭났으면 합니다. 저도 그렇게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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