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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호] 제주 4·3, 국가폭력, 그리고 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4-18 15:39
조회
512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올 해의 제주 4·3항쟁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제주도민에 대한 국가폭력으로서의 의미규정과 더불어 경찰총장의 사과가 있었다. 4·3은 다 알겠지만 신탁을 반대하는 제주도민에 대한 빨갱이 규정과 더불어 민관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제주도민의 다수가 처형되거나 고문 받는 등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남아있고, 누군가는 피해자로서, 또 누군가는 가해자로서 이웃을 대해야 하는 도민들은 삶 그 자체가 고통으로 남아있다.


 이에 앞서 3월 27일~28일에는 ‘제주 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 제주대회’가 열렸고, 28일은 제주 4·3 문학세미나 ‘역사의 상처, 문학의 치유’가 열렸다. 기조 강연은 ‘제주 4·3사건 진행 시 제주여성사회의 수난과 극복’을 주제로 『한라산의 노을』을 집필한 한림화 작가가 맡았다. 한림화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제주의 150개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며 모은 제주 4·3사례 중 여성들의 피해를 소개했다.


 “4·3사건 진행 과정에서 공비로 의심되는 이들의 은신처 혹은 행방을 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가족구성원, 특히 여성들은 무차별 성고문 당한 후 학살됐다. 그러한 학살을 두고 민관군경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대리사살=대살’이라는 명칭을 서슴없이 사용하면서 당연시했음을 확인했다.”며 “대신 죽이는 방법은 성고문 후 나무에 목매달아 서서히 죽이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고 죽이기 등 다양했다.” 특히 “제주여성 인권말살 현장 중에 직접적인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즉 성고문에 대한 사례는 들어도 또 들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 심지어 가해자들이 제주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예도 몇 건 있었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829, 제주의 소리 2019. 4. 10)


 구체적인 사례들은 위의 사이트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국가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정치적 자율권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주체이다. 국가는 권력형성의 주체로서 시민을 목적으로 하는, 법의 수립 및 권리의 정립이라는 목적이면서 동시에 시민의 권리보호를 위한, 법과 권리를 유지, 보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가 목적이든 수단이든 그것은 시민의 권리라는 목적어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국가는 한편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조직체’이자 스스로 판결하는 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국가의 권력은 어느 때고 폭력으로 돌변하기 쉬우며 이에 대한 판결 또한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쉽다. 제주 4·3항쟁을 비롯한 부마항쟁, 광주 5·18 등의 진상이 뒤늦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제주4.3평화공원 내에 설치된 ‘변뱅생 모녀상’. 작품 제목은 ‘비설’이다.
1949년 1월 6일 토벌을 피해 거친오름을 오르다가 여성 변뱅생(당시 25세)이 두 살 배기 딸을 끌어안고 죽은 채
다음해 봄에 발견됐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출처 -  여성신문


 국가폭력은 다른 종류의 모든 폭력(저항폭력)을 불법으로 규정지음으로써 불법적인 폭력에 대한 엄단과 처벌을 주장함으로써 벌어진다. 공적인 자율권으로써의 저항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국가폭력은 국민들의 사적 자율성에 대한 보호를 근거로 내세우며, 여기서 국민은 권력형성의 주체가 아닌 권리보호의 대상으로 추락한다. 시민의 자율성을 주장하지만 공적인 자율성 –저항권, 공론형성권-을 무시하는 국가권력은 폭력이 된다. 국민을 공적시민권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보호대상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기도 하다.


 이렇듯 국가폭력은 국민의 시민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을 국가의 호명에 반응하는 순응적 대상으로 만들고 길들이고 양육해야 하는 대상으로 볼 때 발생한다. 제주에서, 부산 ․ 마산에서, 광주에서 저항했던 시민들은 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부름에 반항하는, 따라서 폭력적인 계도를 통해 순종하도록 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국가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폭력과정에는 반드시 ‘여성화’, ‘성애화’의 과정이 진행된다. 


 “토벌대에 의한 제주도민의 수난은 집단적 성폭력의 양태로 나타났다. 겁탈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신부와 출산중인 부녀자를 총살하고, 한 마을 사람들을 나체로 결집시켜 놓고 가족관계를 불문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가 총살하는...”(김성례. 1988)


 이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가할 때 이는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방법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피해자들이 강간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를 통해 성폭력 여성 피해자들이 피해의 탓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자책 혹은 자기분노를 통해 국가폭력의 부당성을 가리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행해진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들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광주의 피해자 및 그 가족들 역시 수치심에 꽁꽁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드러나지 못했다.


 국가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또 국가는 상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결합으로서의 국가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수탈에 기반하고 있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구조적인 폭력으로서의 차별-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은 여전히 여성의 행동반경을 좁히고 위축하게 한다. 여성에 대한 만연한 폭력들이 서슴없이 자행되는 데는 그러한 아버지이자 상인으로서의 국가가 나 몰라라 하는 배경이 있다. 내전이든, 전쟁이든 위기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성은 국가의 배임아래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국가폭력-시민권에서의 소외-이 여성에게는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권력이 도처에 있다면 저항도 도처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극악한 국가폭력 앞에서 두려움에 위축되었던 희생자들은 이제 말하기 시작했고 끔찍한 사건들이 드러나고 있듯이 여성들도 저항권을 행사 중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중의 저항정치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운 과정에 있다. 공적저항과 사적저항 두 가지의 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저항은 점차 세대를 이어가면서 확산되고 있다. 스쿨미투는 그러한 면을 어김없이 보여주는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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