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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긴 호흡의 희망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4-18 15:19
조회
346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거짓정보와 허위가 판치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5․18망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가의 차원에서도 분명하게 공인된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날조하고, 목숨을 내놓고 민주주의를 사수한 시민들과 말할 수 없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유가족을 “괴물집단”으로 매도하는 일이 21세기 대명천지에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광주폭동’으로 날조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은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여당이었던 김영삼 정부 때 내란 및 군사반란으로 단죄 받았다는 사실을. ‘5·18’의 역사적 성격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법정기념일로도 지정한 것도 1997년의 일이다. 지 아무개 씨가 주구장창 떠드는 ‘북한군 개입설’은 전두환 정권조차 제기하지 못했던 허위선동으로 이미 법원 판결을 통해서 근거 없음으로 판명 났다. 박근혜 정부의 국방부조차 “5·18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소속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은 “우파는 5·18 문제만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 힘 모아 투쟁하자”,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으로 세금을 축낸다. 명단을 공개하라”는 따위의 망언을 쏟아냈다. 망언을 한 사람과 장소를 감안하면 충격은 경악으로 변한다. 시정잡배도 아닌 국회의원이, 음습한 밀실이 아니라 신성한 민의의 전당에서, 다름 아닌 자기 나라 역사와 국민을 능멸하다니. 밥값 못하는 얼빠진 인간도 더러 있는 게 세상이라도 해도, 나랏밥 축내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국회에 있다는 건 세상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은 더욱 기괴하게 전개되었다. 명색이 당 대표와 최고위원에 출마한 사람이 국회에서 피땀으로 일궈온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능멸했음에도, 자유한국당은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짓밟는 망언을 ‘다양한 의견’으로 치부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존재할 수 있다”고 했고,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11일 해당 의원들의 징계 요구에 대해 “보수정당 안에 스펙트럼과 견해차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자체가 보수정당의 생명력”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그것은 충분하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어 보인다. 김병준 위원장은 스스로 당을 대표해 사과한다면서도 망언 의원들에 대한 윤리위 처리 문제를 어이없게도 원내대표에게 떠넘겼다. 한국당이 추천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 후보 3명 중 2명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거부한 데 대해 반발하고 나선 건 더 어처구니가 없다.


 문제가 된 자유한국당 추천 진상조사위원들은 이미 추천할 때부터 극우이념 성향으로 부적격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군 출신 보수인사로, 군이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주요세력이란 점에서 과연 제대로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한 사람은 기자 출신으로 1996년 <월간조선>의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와 과장”이라는 기사에서, 이미 사실로 밝혀진 계엄군의 중화기 사용, 공수부대원들의 성폭행 의혹 등에 대한 보도가 과장·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거 경력과 발언을 토대로 ‘5·18민주화운동’관련 단체들도 이들이 진상조사위원으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자유한국당에 재추천을 요구한 바 있다. 따라서 청와대의 임명거부와 재추천 요구는 역사의 진상을 편견 없이 공정하게 규명하자는 시민들의 열망에 부합하는 당연한 조치인 셈이다,


 자유한국당이 ‘5․18망언’을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망언을 한 의원들에 대한 엄중한 단죄는 물론이고 진상조사위원의 즉각적인 교체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독한 의원들에 대해 얄팍하게도 당규를 내세워 보호막을 제공했다. 잘못된 추천을 반성하기는커녕 “한국당과 국회를 무시”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대응을 고수한다면,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석방 운운하며 탄핵 이전으로 회귀할 것을 꿈꾸는 반(反)헌정세력일 뿐만 아니라 ‘5월 광주’를 유린한 전두환 군부독재로의 퇴행을 기도하는 반(反)역사세력으로 고착되고 기억될 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가 저들에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라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옳고 그름은 정의가 아니라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 마음의 진정성이 아니라 형식적 제스처(gesture)가 표를 얻는 데 효과적이라는 믿음, ‘눈 가리고 아웅’식 대응으로도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경험, 혹세무민에 능수능란한 아군 언론이 있다는 현실의 세계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정의와 진실과 정공법과 정도(正道)를 말한들, 그게 먹히기나 하겠는가! 당장 그들에게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란 수학문제가 아니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풀리면 밑지는 사람들이 방해하기도 하는, 그게 일반적인 세계다. 그럴지라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주인이기에 자기 살림이 결딴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 막스 플랑크(독일의 물리학자, 1858~1947)가 ⌈과학 자서전⌋에 남긴 말을 빌려 긴 호흡의 희망을 상기하고 싶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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