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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왕조의 부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6-21 17:22
조회
392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한성 백제, 송파구에 산다면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어릴 적부터 올림픽 공원 근처 둔촌동에 살았기에 풍납, 몽촌토성은 익숙했지만, 한성 백제라는 단어는 쉽게 들을 수 없었다. 지금은 ‘강동, 송파 일대의 토성과 유적들이 백제의 한강 도읍인 한성에서 유래되었다’가 정설이다. 몽촌토성을 품은 올림픽 공원으로 초등학교 졸업 사진을 찍으러 갈 때는 몰랐던 말, 심지어 20대 시절까지도 공원을 자주 갔지만 한성 백제는 기억에 없다.


기억은 십여 년 전부터 서울시가 ‘한성 백제’ 타이틀을 강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번듯한 한성 백제 박물관이 공원 내에 건립된 지도 이제는 꽤 지났다. 올림픽 공원과 현재 사는 동네인 풍납동의 크고 작은 공원에서는 ‘한성 백제’ 타이틀로 연간 여러 차례의 축제와 전시, 행사를 개최한다.


이런 변화가 사실 ‘나’라는 한 명의 송파구민, 풍납동민에게 그리 영향은 없었다. 집 앞뒤로 유적지란 이름으로 개발이 보류된 공원들이 있어 집을 나설 때면 상쾌한 내음과 함께 비둘기들이 퍼덕대는 정도가 차이다. 말하자면 공원 그 자체는 나의 인권인 쾌적한 생활환경과 더불어, 집주인의 관심사인 집값에도 긍정적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서울시가 한성 백제 사업에 열을 올리면서, 풍납동 일대에 일체의 재개발과 재건축이 사실상 금지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알고 보면 말이 집 앞뒤로 공원이지, 이 두 권역이 유적지라면 그 사이에 위치한 열 몇 채의 집들, 특히나 내가 사는 곳에도 무언가 파묻혀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런 연유로 우리 앞 동만 세 채가 헐려 나갔고, 동네로는 수백 채의 집들이 그대로 공터가 되었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공터가 많은 곳은 어디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십 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서울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기 어렵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곳의 재건축을 금지할 뿐 아니라, 기존의 집들도 궁극적으로 모두 매입해 동네 전체를 ‘한성 백제’로 복원 내지 박물관화 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무도한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 이것은 당장은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재개발이 금지된 집주인들이 시에 (시세보다 비싸게) 사달라고 의뢰한 주택들조차 몇 년은 기다려야 매입이 이루어진다. 현실은 자금 부족, 원대한 이상인 한성 백제의 복원은 느리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다.


글을 쓰면서 복원 사업의 구체적인 보상 방법과 계획을 알아보았으나, 간단한 검색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대부분 풍납동에 사는 분들이 최근에 집들이 많이 헐린다고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올린 포스팅이었고, 이런 글들의 정보는 서울시의 토성 복원 계획과 보상 방안에 대해 한 다리 건너서 들은 수준이었다. 다만 알아보다 보니 우리 집 근처의 구역에서 헐리는 곳들은 왕궁 추정지로 보였고, 조금은 거리가 있는 토성이 길게 이어진 지역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토성의 완전 복원을 추진하고 있었다. 풍납 토성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지만, 현재 일부는 주택과 도로 등으로 중간중간 끊겨 있다.


과연 한성 백제의 복원이란 것이 가능한지, 또 가능하더라도 한성 백제로 추정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해온 원주민들이 점진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마치 소말리아 소개 작전처럼 이곳의 주민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소개되고 있다. 재건축이 없고 소멸되는 집들은 늘어나므로, 주민은 감소한다. 역사 유물의 보존이라는 지고의 가치 아래서, 일부 주민들은 재산권 제한을 넘어 아예 살던 집에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나야 집 없는 전세민으로, 공터에 걸린 ‘재산권 보장하라!’는 플래카드에는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있던 집이 헐리고 블록 깔린 주차장, 우레탄 깔린 공터로 바뀌는 것이 수년간 반복되니 이제는 혼란스럽다.



공사 전(위), 후(아래)의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정말로 동네 전체가 궁극적으로 없어지는 것일까? 이것이 낭설일지라도, 좀 과장한다면 천 년도 이전에 거주했던 백제인들의 삶의 흔적이, 같은 땅에 거주하는 그 후예들의 생활권에 우선하는 것일까?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재산권을 넘어 실거주권마저 포기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아직 우리 집이 헐리지 않았기에, 주차장과 공터, 공원이 늘어나니 나에게는 여전히 좋은 현상이다. 그럼에도 철 지난 ‘전 국토의 산업화’란 구호처럼, ‘전 풍납동의 한성 백제화’라는 구호는 뭔가 섬뜩하다. 이곳의 집이 모두 없어지고 한성 백제 시절의 도성, 그날의 이곳을 완성하는 때가 실제로 올 것인지, 그것이 가야할 방향인지는 물음표가 달린다. 동 주민으로서 드는 실질적, 생활적 의문이기에, 인권을 중요시 하는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해석될 지도 궁금하다.


<인권의 발명>이란 책에서는 인권이 필요에 따라 발명된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역사에 대한 보존이라는 가치도 시대에 따라 그 경중과 우선이 변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21세기에 들어, 훼손되고 잃어버린 20세기까지도 보상해야 할 것 같은 당위성 아래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사는 풍납동에서는 그래 보인다.


집과 땅의 가치를 뒤로 두는 동네 공터화, 평탄화는 요즘 같은 부동산 시대에, 사실 신선하다. 그럼에도 한성 백제 복원의 화살이 나에게,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올 때가 머지않았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유물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 희생해야 할 사람은 집 주인인 너뿐 아니라 거주민인 나 자신도 곧 포함될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올량이면 이렇게 외치고 싶다. ‘거주권이 우선이다!’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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