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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호] 아프다고 말하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6-12 10:48
조회
336

조예진/ 회원 칼럼니스트


 꽃피는 3월이 다가온다. 학생들도 그렇겠지만 교사들도 3월이 두렵다. 올해는 어떤 나날이 펼쳐질까. 수월하게 지나가는 해가 있고,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 해가 있다. 무사한 한 해를 기원하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각오를 하며 집을 나서는데 여전히 바람은 쌩하니 불고 봄은 멀리 있는 듯하다.


 작년에 여기저기 몸이 아팠다. 예전부터 약했거나 꾸준히 살폈던 부분도 있었지만, 건강검진 결과 자궁 쪽이 좋지 않다고 나왔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산부인과에 들렀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겠지만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각오가 필요하다. 굴욕의자에서 검진 받을 때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진료실에서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다. 상태를 설명하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주 2~3회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조신하게 앉아 있지 않으면 혼날 것 같았다.


 진료실을 나와 병원의 진료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평일 오후 6시 진료 마감, 5시까지는 접수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검진 결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앞으로 진료 받을 생각을 하니 더 복잡해졌다. 수업 시간표를 확인했다. 화요일에 7교시 수업이 없으니, 화요일에 병원에 가는 것이 낫겠다. 5시까지 병원에 도착하려면 수업을 바꿔야 하는데 쉽게 바꿀 수 있을까. 조퇴할 때 무슨 이유를 대야 할까. 종례와 청소는 누구에게 부탁할까.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학교는 말이 빠른 곳이다. 2층 교장실에서 한 얘기가 5층 교무실까지 퍼지는 데 30분이 안 걸린다는 말이 있다. 나도 모르는 학교 이야기를 우리 반 아이들이 시시콜콜 먼저 알고 있기도 한다. 걱정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싫었다. 나의 조퇴 사유는 치과 진료, 은행 업무, 가족 간병 등으로 매번 바뀌었다. 사람 좋은 남자 학년부장은 내가 말하는 여러 핑계를 그냥 넘어가 주었고, 자주 조퇴를 달았는데도 윗분들은 내 조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 아이들은 내가 없으니 청소를 더 잘하고 더 밝은 것 같았다.



사진 출처 - 필자


 병원에 온 환자들은 20대에서 60대까지 나이가 다양해 보였다. 큰 병원으로 옮긴다며 진료실을 나서며 눈물짓는 어느 환자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았다. 아프다는 판정을 받으니 배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화장실도 자주 갔다. 괜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별일 아닌데도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내가 자주 일찍 나가는 것을 걱정한 몇몇 여선생님들에게만 사실을 공유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병을 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으로 검색한 무시무시한 병명들을 대충 다 들은 것 같았다. 공통점은 대부분 나처럼 여러 핑계를 대가며 혼자 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서 수업을 하는 교사들에게 자궁 질환이 흔한 건 당연한데도 산부인과 검진을 꺼려, 1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하는 자궁경부암 검진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동료들도 여럿이었다.


 10년째 학생들의 선호 1위 직업이라는 교사들조차 아프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이 세상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아픈 것을 참고 화장실을 못 가며 일을 하고 있을까 짐작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며 병원은 다닐 수 있을까. 몸이 아픈 것을 자기 관리의 문제로 치부하지는 않을까. 당장 학교에서도 몸이 아파 조퇴하고 싶다는 학생에게 일단 참아보라고 하지 않는가.


 미투(#MeToo) 운동이 한창이다. 나도 아프다, 나도 사람이다, 라는 외침이다. 유난히 뉴스를 많이 봤던 작년처럼 세상에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사람들이 덜 아팠으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올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다. 3월이 온다. 봄이 온다. 


조예진 :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는 좋아하지만 수능 필수 한국사는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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