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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막말의 시대 유감(有感)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1-09 18:49
조회
337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라 안팎으로 막말이 유행이다. ‘돈은 막고 말은 풀라’는 요구가 나올 선거철도 아닌 데, 어디서 ‘막말의 달인 뽑기 세계대회’라도 열렸나 싶을 정도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막말이 기승을 부린다. 이제 “관 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는 속담의 시대는 거(去)하고, 거리낌 없이 속되게 말하는 망언의 시대가 래(來)한 것인가? 잠시 생각을 모아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궁리가 선다.


  막말하는 사람들이 오늘의 세계에 갑자기 출몰한 건 아니다. 그런 사례는 역사에 무수하다. 여성에게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자격은 있어도 투표할 권리 따위는 없다고 망발한 자들도 있었고, 백인종이 ‘열등한’ 인종인 황인종과 흑인종을 지배해야 마땅하다고 떠든 인종주의자 고비노(1816~1882)의 막말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태평천하”라고 외친 자도 있었고,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자행한 독재자에게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며 시답지 않은 망언을 읊조린 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막말의 강도가 세졌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우선 나라 바깥을 보면, 개인으로는 세계에 제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 대통령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은 특히 트윗(‘멍청이’라는 뜻의 twit이 아니라 ‘tweet’)이 눈에 띤다. 대통령 되기 전부터 그는 부자로서가 아니라 막말로 더 유명했던 모양이다. 작년 10월까지만 해도 일부 영국인들은 영국의 EU 탈퇴로 영국 국민이 <올해의 가장 멍청한 국민>으로 뽑힐 거라고 탄식했으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그 상(?)은 이제 미국 국민에게 돌아가게 됐다며 안도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는 선거 유세 중에 테러를 막으려면 물고문보다 더 센 것도 필요하다느니, 자신에게 불리하게 보도하는 언론 뉴스는 모두 가짜라느니, 모든 나쁜 것은 오바마로부터 비롯되었다느니 하며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막말은 미국 ‘내’만이 아니라 국외를 향해서도 계속됐다. 중국과의 무역을 놓고는 중국이 미국을 강간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했고,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2015년 8월 21일,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 라디오 방송 와피(WAPI)의 ‘매트 머피쇼’에서) “나는 한국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거 아나? 우리는 삼성, LG의 제품을 한국에서 들여오고 그들은 많은 돈을 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만 우리는 얻는 게 하나도 없다”며 “이건 미친 짓”이라는 저속한 표현을 막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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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한겨레


  나라 안으로 눈길을 돌리면, 정 아무개 의원의 막말이 단연 도드라져 보인다. 말을 그대로 옮길 경우의 혈압상승을 염려하여 추려 적자면,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부부싸움 끝에 목숨을 끊은 거 아니냐고,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이명박 정부 시절 밥을 굶었냐고 으르렁거리는 말들을 연속해서 쏟아냈다. 그의 정략적 노림수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말에는 사자의 명예훼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고인이 직접 항변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려는 비열함과, MB정권이 니들에게 린치를 가하지 않았고 감옥에 보내지 않았으며 밥줄도 완전히 끊지 않은 걸 다행으로나 알라는 거들먹거림의 비릿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 어디에도 간난(艱難)한 삶을 견뎌온 사람을 보듬어주려는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거룩한 선서를 3번이나 한 국회의원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당자들은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만 그랬냐? 맞다, 다른 사람도 그랬다. 착란(錯亂)상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국내의 막말 세 개만 상기해 보자. “현 정부는 가장 깨끗한 정부다.” 김기춘 씨가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2015/2/22)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한 말이다. 2015년 7월 당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서청원 씨는 “박근혜 정부는 가장 역대 정권 중에서 대한민국을 가장 민주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년 전(2010/7/30), 이명박 각하의 발언, “우리 정부는 도덕적으로(‘도둑적으로’의 오기가 아니다!) 깨끗하게 출발했다. 도덕적으로 떳떳한 정부의 전통을 세워 나가도록 하자.”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거나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철학적 언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을 보면, 의도까진 몰라도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생각의 수준을 알아챌 순 있다. 물론, 고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모두 고매한 인격자는 아니다. 말을 잘 꾸며대는 위선자나 지능적 사기꾼도 있다. 허나, 막말하는 사람은 대개 고매한 인격자가 아니다. 고상한 생각을 한다고 믿기도 어렵다. 아니, 사적으로는 좋은 (조)부모, 남편, 아내, 딸,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적으로 좋은 위정자로 평가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역사는 손에 쥔 권세를 내려놓느니 차라리 나라를 망치고 말겠다는 후안무치한 자들을 보여준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할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찬성에 서명했다. 나라를 왜적에게 팔아먹은 이런 을사오적과 같은 파렴치한이 오늘의 세상이라고 없겠는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기꺼이 매국도, 매판도, 막말도 하겠다는 자들이 있다고 보는 게 꾸밈없는 현실인식일 것이다.


  악이 없는 세상, 몰염치한 족속들이 사라진 세상을 꿈꿀 순 있어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란 난망하다. 설령 적대적 사회모순이 사라진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되어도 개인적 실패나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놀부나 막말을 내뱉는 자도 있는 게 세상이다. 흥부들만 사는 세상은 없다. 그러나 막말하는 자들에게 공적 권한이나 자리를 주지 않는 세상은 만들 수 있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에게는 사사로움에 사로잡힌 모리배(謀利輩)가 두 번 다시 공적 영역에 발들이지 못하도록 할 책무가 있다. 주권자인 시민에게는 그럴 힘도 있다. 주권재민의 힘만큼은 아낌없이 쓰자. 품위 있는 공공언어의 시대로 어서 가자.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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