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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 59호] 박정희와 박근혜의 쓰리쿠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09:59
조회
386

안수찬/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겨레신문 기자


 2004년 7월 13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두 가지의 ‘역사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하나는 열린우리당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한 일이다. 이 개정안은 지난해 16대 국회 막판 ‘누더기’로 변질된 친일진상특별법의 제 모습을 찾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일제시대 군수 아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향해 막말을 하며 손수 ‘누더기’를 만들어냈던 16대 국회 말미의 참혹한 기억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다. 17대 국회 들어 열린우리당을 평가해줄 거의 ‘유일한’ 성과가 아닌가 싶다.


 같은 날 일어난 두번째 ‘역사적 사건’은 박근혜의원의 발언이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 8명까지 발의에 서명한 이 개정안에 대해 박의원은 “이런 문제는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박의원의 이날 발언은 우선 ‘함부로 단정적 발언을 하지 않는 그동안의 정치적 스타일을 사상 처음으로 뒤집어버렸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그가 정치 현안에 대해 이토록 신속하고도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박의원이 ‘트레이드 마크’처럼 철저히 유지했던 신중한 정치적 스타일을 과감히(혹은 다급히) 무너뜨리게 된 배경에는 당연하게도 그 아버지인 박정희의 친일이 있다. 그래서 2004년 7월 13일은 60여년에 걸친 ‘쓰리쿠션’이 이뤄진 날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친일이 있고, 친일에 대한 진상규명의 노력이 있으며, 진상규명을 저지하고 박정희를 변호하려는 그의 딸 박근혜의 저항이 있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이제 세상이 다 알고, ‘눈과 귀를 한사코 닫으려는’ 사람만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친일이 뭐가 문제냐’는 식의 오도된 역사인식이다. 친일진상규명법은 민족의 뿌리와 대한민국 공화정의 토대를 뒤흔드는 이런 ‘반체제·반민족·반국가적’ 착각에 메스를 들이대는 일이다. 그 사상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는 국가보안법의 반헌법적 법리가 진정 옳다면, 국정원은 이런 천진난만하되 위험천만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부터 잡아 들여야 할 것이다. 친일을 옹호하고 관용을 베푸는 자, 대한민국의 존립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박근혜 의원은 이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한나라당의 비극은 친일독재자의 딸을 당 대표로 선출했고, 다가오는 후임 대표에 다시 한번 그를 불러앉힐 것이 유력하다는데 있다. 아버지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아들된 도리로 아버지를 숨기는 게 당연하다고 가르치는 유교 윤리에 따르자면, 박의원에게 아버지 박정희의 친일행위를 모두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일에 ‘침묵’하게 내버려 두는 것까지가 이 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이 아닐까.


 그러나 과거의 구태와 절연하겠다는 한나라당으로선 그들을 따라다니는 부패·수구·냉전·친미·친일이라는 낙인을 벗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몇몇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이번 개정안 발의에 동참한 것은 이를 인식한 결과다. 지금까지의 정치전개 과정을 보자면, 보수세력 쇄신의 적임자인 것처럼 대접받는 박의원 역시 ‘과거청산’의 대열에 동참해야 옳다.


 다시 한번 그러나, 박의원은 다른 길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박의원이 ‘인륜의 도리’와 ‘정치의 도리’ 사이에서 인간적 고뇌를 겪은 흔적조차도 없다. 그는 너무나 쉽게 어느 한쪽을 택했고, 국민들은 다시 냉소하기 시작했다.


 보다 근본적인 딜레마는 한나라당의 신진세력이 그 이념지향으로 ‘성장·개발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박정희 시대의 성장주의를 21세기적 상황에 맞게 다시 구현해내는 것이 한나라당의 유일한 활로라고 믿고 있다. 이들에게 박정희는 결코 ‘폐기’되거나 ‘청산’되서는 안될 정치적 전범이다.


 하여, 2004년 현재 아버지 박정희와 딸 박근혜, 그리고 친일과 군사독재 및 한나라당은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착종’돼 있다. 그들은 성장의 주역을 친일로 매도하지 말라고 주장할테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성장주의의 장단을 냉정하게 평가하는만큼 친일행위 또한 그러해야 마땅하고, 해방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그 첫 삽을 뜨고 있을 뿐이다.


지금 60여년에 걸친 거대한 ‘쓰리쿠션’은 ‘삑사리’나게 생겼다. 아버지가 친 공, 그 딸이 굳이 받으려 하지 말고 준엄한 역사의 심판에 맡겨둬도 되는데, 그걸 모르니 측은하기도 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죽고 사라진 오늘에 와서야,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공적인 국가기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허락했다. 지금 가슴 아픈 것은 이제야 그 일을 시작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피멍든 가슴에 정치의 이름으로 침을 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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