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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호] 벌금제 개혁과 장발장은행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0-21 13:10
조회
735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장발장은행, 2015년 2월 25일 문을 열었으니 5년 8개월이 지났다. 언제쯤 문을 닫을 수 있을까? 처음부터 일찍 문 닫기를 바라고 연 은행이었다. 한국의 장발장들을 줄이고 없애는 게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을 쓴 미셸 푸코가 동료 제자들과 함께 꾸렸던 <감옥감시단>도 없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장발장은행과 같았다.


 한 사회의 인권 수준이나 실태를 알려면, 이주노동자와 재소자를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내국인들과 접촉하는 소수자여서 인권침해를 당하기 쉽다면, 재소자들은 거꾸로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푸코가 꾸렸던 <감옥감시단>이 재소자들의 인권상황을 감시하려고 태어났다면, 장발장은행은 한국사회를 향해 벌금제 개혁을 요청하고 시위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장발장은행이 계속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벌금제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바라는 벌금제 개혁의 요체는 현행 총액벌금제를 수형자의 재산, 소득과 연동하는 일수벌금제로 바꿔달라는 데 있다. 일수벌금제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장발장은행은 문을 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벌금제 개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권연대가 2014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 43,199” 캠페인을 벌인 뒤 장발장은행이 문을 연 2015년이 저물던 12월 9일에 벌금제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벌금형에 집행유예제도가 도입되었고, 현금만이 아닌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 지불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분할 납부와 연기도 법률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매년 4만여 명인 장발장들의 숫자가 절반 정도는 줄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개혁 법안이 2년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되기 시작한 2018년에도 3만 5천명 수준으로 크게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도개혁이 미흡했다는 것, 그래서 소득과 재산에 따라 차등을 두는 일수벌금제의 도입과 함께 교도소에 가두는 대신 사회에서 봉사하도록 벌금제도를 바꾸는 것만이 장발장은행 문을 닫을 수 있는 관건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일수벌금제는 범법 행위의 경중에 따라 일수를 정하고 그 일수에 수형자의 재산, 소득을 곱하여 벌금액을 정하는 제도다. 한국의 현행 총액벌금제를 일수벌금제로 바꿔 달라는 우리의 요구는 수형자의 재산과 소득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는 답변에 부딪혀 왔다. 월급생활자뿐만 아닌 모든 주민에게 건강보험료를 책정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우리로선 승복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솔직한 내 속내를 드러낸다면, 사법당국의 행정편의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보듬으려는 의지보다 앞선다는 점이며, 그래도 될 만큼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어쭙잖게 은행장의 소임을 맡아 벌금 대출심사에 참여하면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돈의 주인이 아닌 돈의 노예가 된 물신주의 사회라지만 그럼에도 곳곳에 따뜻한 마음들이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장발장은행에 성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드린다.


 다른 하나는 가난의 대물림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무척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의 서사는 보이지 않고 어쩌다 숫자로만 기록된다는 점이다.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들은 잘 알려지지만, 매년 4만 명에 가까운 장발장들이 교도소에 갇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동시대인은 드물다. 부의 대물림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가난의 대물림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시기든 부러움이든 부의 대물림 쪽만 향한다. 일찍이 크롯포킨은 “법은 힘센 자의 권리”라고 했는데, 가난한 사람이 법 제도의 혜택을 받으려면 힘센 자에 얹혀 낙수효과를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갖게 된 불온한 질문이다.


 핀란드의 노키아 회사 부회장이 오토바이로 시속 60킬로미터 속도제한구역을 시속 80킬로미터 넘게 주행하다 적발돼 11만 6천유로(1억 5천 6백만원)의 범칙금을 물었다는 유명한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가진 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강조되는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살펴야 한다는 정신이 일수벌금제를 일찍부터 시행토록 했을 것이다.


 실제로, 핀란드는 1931년부터 일수벌금제를 시행했다. 그들은 그때 이미 수형자의 재산과 소득을 ‘정확히’ 파악했을까? 결국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1975년부터 일수벌금제를 시행하고 있는 독일은 하루 당 2유로에서 1만 유로까지 수형자의 재산 소득에 따라 5천 배의 차등을 두고 있다.


 유럽 나라들은 물론 남미 나라들도 시행하는 일수벌금제를 ‘K-방역’을 자랑하는 한국이 시행하지 않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할 뿐이다.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로 기억한다. “선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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