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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호] 독일에는 군인묘지가 없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2-20 12:51
조회
1638

이재승/ 운영위원,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많은 국가들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거나 지대한 공헌을 남긴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묘지나 기념관을 설치한다. 미국에서도 알링턴 묘역을 포함해 다수의 국립묘지들이 산재하며, 프랑스에는 특별한 위인들을 모시는 팡테옹과 같은 시설도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국립현충원, 4.19묘역, 5.18묘역, 효창공원, 호국원 등 국가관리 묘역이 산재해 있다. 묘역에 안장되는 대상자들도 호국유공자, 독립유공자, 민주화유공자, 사회공헌자 등 유형이 다양하다. 이와 같이 유공자의 이질성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이 비일비재 발생한다.


 필자는 군인에 대한 문제만 거론해 보겠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국립묘지는 전몰 군인을 기리는 장소로 등장하였다. 무명용사비가 이러한 원형적 관념에 잘 어울린다. 먼 객지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군인의 무덤이나 기념비만큼 인간의 감정을 숙연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런데 한국의 국립묘지법은 전몰 또는 순직 군인뿐만 아니라 일정기간(20년 혹은 10년) 근무한 퇴역군인에게도 안장될 권리를 부여한다. 이와 같이 죽음 자체의 공무관련성이 전제로 요구되지 않는다면 국립묘지 안장권은 신분상의 특전을 의미하게 된다. 근속연수를 충족했다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될 후보자들이 현재로서도 10만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전몰 혹은 순직 군인과 장기복무자를 동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묘제가 옳은 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오늘날 장묘문화는 선영을 중심으로 한 가족묘역 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장이나 납골당 등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국립묘지의 조성형태도 다각화해야 한다. 국립묘지법도 큰 그림에서 종래의 매장방식을 지양하고 자연장, 수목장, 봉안담, 각명비 등을 도입하고 있으며 안장연한제도(관리기한)까지도 예정하고 있다.


 어느 나라든지 묘제는 해당국가의 지배적인 문화나 종교 관행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군인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보편적 애도의 시각에서 검토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군인묘역은 전쟁을 예찬하고 군사적 영웅을 숭배하는 쇼비니즘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 합사는 나쁜 사례라고 한다면, 오키나와의 평화의 초석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평화의 초석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죽음을 보편적으로 애도하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기도를 의미한다.


 군인의 묘역과 관련하여 독일의 제도를 소개해보겠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전선을 확대하였던 까닭에 도처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낳았다. 독일은 군인들이 사망한 현지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출범한 ‘독일전몰자묘역관리협회’는 정부를 대신하여 해외에 존재하는 독일군 묘역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해왔다. 이 협회는 현재 800개 이상의 군인묘지를 관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군대를 폐지한 독일은 1950년대 중반 군대를 재건하였다.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그 후 현재까지 6천 8백명 이상의 독일 군인이 사망하였다. 이 중에 3천 2백명 정도가 순직자로 분류된다. 그런데 독일정부는 참으로 ‘혁명적으로’ 전몰, 순직 군인을 위한 국립묘지 또는 군인묘지를 조성하지 않았다.


 독일은 사망한 군인에게 군사적 예우로써 장례식을 거행한 후 군인의 유해를 가족에게 인계한다. 가족은 관례상 유해를 교회묘지나 자치단체의 관리묘역에 안장해왔다. 유해의 안장문제는 가족의 결정사항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묘지안장과 관리는 법제상으로 주정부의 소관사항이고, 모든 독일인은 관리묘역에 안장될 권리를 갖기 때문에 안장권은 한국에서와 같이 전혀 뜨거운 쟁점이 아니다. 어쨌든 국립묘지나 특별한 군인묘지를 조성하지 않기 때문에 독일은 군사주의나 파시즘의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일통일 이후 잦은 해외파병, 군인의 사망사고를 배경으로 퇴역군인 단체들은 미국처럼 군인묘지를 조성해줄 것을 독일당국에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정부는 2009년 군인묘지 대신에 상징적 기념시설(Das Ehrenmal der Bundeswehr)을 조성하였다. 기념시설은 베를린의 국방부 경내에 조성되었다.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의 정치인들은 국회의사당 근처에 조성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국방부의 부대시설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 기념시설은 길이 32미터, 너비 8미터, 높이 10미터의 강철판으로 조성되었다. 기념시설 내의 추모명부에는 2019년 현재 3천 2백명 정도의 군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독일군대가 재건된 이후 6천 8백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는 사망한 군인을 동일한 마음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사고사나 공무관련성이 없는 자살자는 애도의 대상에서 배제되고 있다. 자살자를 보편적으로 애도하는 나라는 없는 모양이다.


 추모의 숲(Der Wald der Erinnerung)은 사망군인을 위해 2014년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 조성된 자연공원이다. 추모의 숲은 개인적인 애도의 장소로써 앞서 말한 국방부 내의 독일군 기념시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추모의 숲에는 추모의 길을 포함하여 10개 추도시설과 추도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해당군인이 자살했는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자살자들도 비로소 애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추모표식(추모의 숲, 포츠담)


 독일은 자살한 군인에 대하여 국가책임(보훈책임)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그 요건이 비교적 엄격하다. 물론 일반적으로 자살한 군인과 순직한 군인을 동일한 잣대로 처우하는 국가는 찾을 수 없다. 국제적으로 보자면 대다수의 나라들이 자살군인에 대한 무책임에서 점차적으로 국가책임을 강화하고 이른바 국가유공자(순직자)와 비순직자 간의 격차를 축소해왔다.


 한국에서도 2012년 대법원은 자해사망과 업무간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자유의지가 개입되었더라도 국가는 자살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결정하였다. 이 판결은 독일의 판례보다 매우 전향적인 원칙을 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보훈법제는 이 판결의 혁신적 관점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한국의 군대만큼 위험으로 가득 찬 군대도 드물다. 그래서 의무복무군인(현역병 및 의무복무중인 부사관, 초급장교)의 자살에 대해서 전면적인 국가책임을 인정하자는 견해가 지지를 얻고 있다.


 2019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여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과 관련하여 피해신고를 받고 있다. 이 위원회의 진상규명활동이 끝날 즈음에는 보편적 애도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한층 더 높은 기준이 제도화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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