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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누가 나를 앵무새로 만드는가(최유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1-20 16:03
조회
703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거리에는 나를 유혹하는 손이 많다. 보이지 않지만 이끌림을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짓. 그 손짓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음식점 테이블에 앉아있다.


 오늘의 손짓왕은 순댓국이다. 뽀얀 국물 속으로 병천 순대를 비롯해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가 그득 들어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이 뚝배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접시 가득 담긴 부추를 몽땅 넣고 공깃밥을 모조리 만다. 혀끝을 맴도는 달콤하고 구수한 맛. 국물을 음미한다. 여기에 김치가 빠질 수 없다. 국물을 머금고 있는 밥알과 고기로 숟가락 위에 산을 만든다. 그 위에 젓갈이 듬뿍 들어가 시원한 김치를 얹는다. 입을 크게 벌려 욱여넣는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행복의 맛. 그래, 이 맛이지.


 고개를 뚝배기에 묻을 기세로 열심히 뚝배기를 비워나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져 왔다. 입안의 고깃덩어리를 다급히 씹어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딸, 저녁 먹었어?”
“지금 먹고 있어. …… 샐러드.”
“잘하고 있네! 그래, 살은 좀 빠졌지?”
“어, 그게, 그냥 뱃살은 좀 빠진 거 같아…….”


 시선은 식어가는 국물에 고정한 채 이미 짜인 대본에 따라 입만 움직인다. 엄마는 이 연극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엄마에게는 연극이 아닐 테니까.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화기 너머로 당뇨니 고혈압이니 고지혈증이니 크론병 같은 무시무시한 병명들을 나열해댔다. 처음이야 무서웠지만, 너무 자주 듣다 보니 남의 일인 것 같다.


 물론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소화력이 떨어지는지 속이 더부룩한 날이 많다. 하지만 찾아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이 병들보다는 더 강력한 병이 있으니 문제다. 이름하여 상상력병. 음식의 향과 맛을 상상하면 잔소리에 따가워진 귀의 감각은 무뎌지고 코의 감각은 강렬히 살아나며 입안에는 침이 고인다는 그 전설적인 병. 난 그 병을 앓고 있다.


 식사 중이라는 핑계로 그나마 전화를 빨리 끊을 수 있었다. 다시 숟가락을 들려고 했지만, 이 좋아하는 순댓국조차 거짓말을 해가며 먹어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왈칵 솟구쳐 왔다. 엄마도 나도 각자의 각본에 따라 ‘다이어트’를 앵무새처럼 말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명사 하나로 요약하라면 바로 그놈의 ‘다이어트’가 아닐까. 무슨 구전동화도 아니건만 여성의 몸은 어딜 가도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회사에서, 명절의 친척집에서. 심지어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그렇다. 연애, 결혼, 출산 같은 화제도 꼭 다이어트로 귀결되고 만다. “요즘 살찐 여자 좋아하는 사람 없어”,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려면 살은 빼야지”, “나중에 임신하면 진짜 힘들어. 지금 빼둬야 해” 등등. 하도 이런 말들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또 슬프다. 그렇게 오늘도 고문 같은 타자들의 시선과 언어에 둘러싸여 ‘다이어트’를 말하고 듣는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런 세상에 화가 나지만 싸울 용기는 크지 않은 것 같다. 순댓국을 먹고 있다는 것을 거짓말로 넘기기에 급급한 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렇다. 과연 내가 이런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런 전화를 받고서도 눈앞에서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순댓국에 입맛이 당기는 내가? 모르겠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뚝배기를 비스듬히 기울여 받침에 걸쳐 두고 남아있는 밥과 국물을 먹는 것뿐이다. 아니, 뚝배기를 들어 국물까지 싹싹 마셔 버리는 것까지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에라 모르겠다. 먹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