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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인권연대 간사),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 당신의 편견, 내 안의 차별에 저항하라.(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3-29 18:05
조회
137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당신의 편견에 도전하라. 아니면 그것들이 당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 시즌 1기 4부 중에서


1. 우리에게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는, 장애인이 된 것은 억울한 것인가? 자연스러운 것인가? 이름인가? 정체성인가? 개별성인가? 사회와 국가의 효과적인 지원을 위한 분류 제도인가? 분류제도일 뿐이라면 이름으로 쓰는게 타당한가? 장애인(人)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것인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의 생물학적 차이를 밝히는 정의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가치와 구조적인 차별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장애인 단체와 기관들은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 단체인가? 장애인 문제 해결을 통해서 전체 인권 문제를 견인하려는 인권 단체인가? 서비스 기관인가? 운동단체인가? 이익 단체라면 장애인의 이익에 충실한가? 인권단체라면 장애인의 인권 문제에 충실한가? 서비스 기관이라면 전문성을 높이는데 충실한가? 운동단체라면 장애인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가?

 그런데 장애인이란 실재로 개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개개인이 생물학적 위치, 사회경제적인 위치에서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체성과 개별성 중에 하나인가? 장애인 제도 자체가 국가와 사회가 만든 정의여서 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중첩된 정체성이자 위치성이라면 그것을 무시하면 장애인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여성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장애인 문제만 해결하면 장애 여성 문제는 해결 되는 것인가? 장애인 기관에 종사하는 많은 활동가 중 여성들도 많은데 그들에게 기계적으로도 동등한 조직적 권리와 구조를 가지는가? 그 많은 활동가들이 비정규직 계약직임에도 장애인 노동권을 대변해 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느슨한 노조 결성조차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장애인 기관들이 중증 장애인들이나 감각 장애인, 발달 장애인, 정신 장애인을 활동가로 고용하기를 꺼려하면서 국가나 기업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어렵더라도 기계적으로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도 추구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지금은 활동을 잘하고, 오래했고, 기존의 권력과 인맥을 가진 장애인만이 현장에 진입하고 있는가? 왜 다양한 청년들이, 왜 다양한 젠더들이, 왜 사회적 이슈들이 장애인 문제와 융합되거나 교차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비장애인들에게, 국가와 사회에게 장애를 차이로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우리는 정작 그들을 설득하고 이끌어 낼만큼 차이의 정치, 다양성을 실현하고 있는가? 아니 실천이라도 차치하더라도 사유라도 하고 있는가?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다(多)문화 가족이나 자녀들을 호칭할 때 만들어진 다문화는 태어날 때부터 ‘다문화’인가? 스스로 ‘다문화’ 인가? 내부인이나 동질적인 사람들이 외부인이나 이질적인 사람들을 이름 붙이는 권력이 있을 때 ‘다문화’라고 누구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다문화’ 사람1)들은 분명히 신체적으로 이질적인데 왜 이들은 장애란 이름을 쉬이 붙이지 않고 문화란 이름을 붙이는가?

 장애인의 정치 권력이 중요하다면 장애인 등록이 가능한 사람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가?

 한정된 예산과 지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장애인’에 대한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것이 중요한가?

 장애가 ‘정체성’이라면 당연히 서로 다른 장애인들끼리 소속감과 연대의식이 생겨야 하는데 장애인 대학생이나 교수들과 시설의 장애인들은 정말 서로의 연대의식과 소속감을 가지고 있을까?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있다면 왜 많은 장애인 단체에서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나, 정신 장애인2), 감각 장애인을 같은 동료로 선발하는 운동이나 구체적인 정관을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주 소수를 빼고는 단체장들이 거의 남성이거나 지체 장애인이거나 척수 장애인이거나, 고학력자들3)인데 이들은 결국 젠더 차별의 결과로, 중증 장애, 장애유형에 따른 사회적 자산에 의한 차별의 결과가 아닌가?

 우리는 그동안 노인, 어르신의 사회 문제가 인권문제가 장애인 문제와 동일하다 인식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지하철에서 승강장에서 서로 갈등하고 혐오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어르신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유아차를 끄는 사람들과 뜨겁게 연대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특수학교를 지어달라고 무릎을 꿇는 부모들에게 자립을 꿈꾸는 우리가 먼저 나서서 싸우겠다고 학교 현장의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겠다고 못하는가?

 

출처: 미디어 제주


2. 우리에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남성 및 여성의 역할, 신념 체계 및 태도, 이미지, 가치, 기대 등을 말한다.4) 우리는 역사적으로, 직관적으로, 경험적으로, 학문적으로, 통계적으로, 다른 사회의 소수자가 가졌던 차별과 소외의 문제가 장애인의 그것과 같음을 깨닫고 있다.

 우월함과 열등함에서 여성의 문제가, 정상과 비정상의 논의에서 동성애 문제가, 공포와 무지의 난민 문제 –그렇게 좋으면 너희가 데리고 살아라– 가 장애인 문제와 강력하게 연결되고 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단체에서 그 아는 것을 실천하며 사회를 이끌고 있는지는 사회를 보아야 한다. 장애인 단체나 활동가들이 이익 단체가 아닌 ‘인권’이란 이름 아래 당당히 일을 하려면 젠더 의식과 젠더 이슈의 실천은 충분 조건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장애인 단체는 아직까지 성평등도 아닌 한참 뒤쳐진 ‘양성평등’도 제도적, 절차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성도우미 논제에서의 남성 중심성, 이성애 중심 때문에 장애여성은 욕구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돌봄 노동의 여성 편중과 모성 중심의 구조는 젠더 문제에서 장애인을 착취의 주체인 동시에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3. 우리에게 상호 교차성 다양성은 무엇인가?

 작금의 헐리우드 영화들은 'PC(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한창이다. 한국말로 '정치적 올바름'이란 뜻인데, 차별적인 언어나 활동을 중립적으로 바꾸자는 운동으로서 여성이나 소수인종 문화를 영화의 소재나 주인공으로 삼는 운동이다. 때로는 작위적 해석과 억지스러움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기획이나 각본 단계에서의 당사자의 참여와 전문가들의 자문으로 질이 높은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성평등이 이루어져 있는지를 평가하는 테스트가 있다. 바로 ‘벡델 테스트’이다. ‘벡델 테스트’란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얼마나 남성 중심의 영화가 많은지를 측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1.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 할 것 2.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3. 남성와 관련된 주제 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 이럼에도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혐오할 수 있음으로 영국 연극에서 나온 스핑크스 테스트란 것도 있다. “무대 중앙에 여성이 있는가?”,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인가?”, “여성 캐릭터가 호소력이 있고 복잡한 인물인가?” 등 극작가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들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서 여성 대신에 ‘장애인’을 넣어도 참으로 유효하다.

 장애인 부부들 특히 발달 장애인, 정신 장애인끼리 제도적으로는 결혼이 인정 받고 있지만 가족들에게 터부시되고 사회적인 금기가 되어있는 것처럼 동성애 부부들이 역시 그러하고 장애인 부모나 게이 레즈비언 부모들이나 현행법상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장애인들이 적극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외국에 장애아동을 입양보내는 것보다 동성애 커플들이 장애아동을 입양해서 잘 키우는게 더 인권적이지 않는가? 장애인 당사자가 동성애자라고 하면 우리 기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아무 거리낌없게 지원할 수 있겠는가?

 불과 10년전에만 해도 재활난민이란 이름으로 전세계에 이민을 갔던 한국의 장애인 부모들, 이제 외국의 장애인들이 전쟁 때문에, 고문 때문에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는데 한국의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5)

 결국에는 장기적으로는 대부분의 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학생, 외국인 노동자, 북한주민들이 참여하게 될텐데 그들이 인권을 외면한 채로 질 좋고 인권적인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외부의 그들에게 연대와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연대와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문을 열고 만나며 공부를 해야 그들에게도 ‘문을 열어달라, 만나달라 공부해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 문제가 모든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이 되었을 때, 장애인 가족이 되었을 때, 장애인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비장애인’ 의 문제이듯이 모든 인권의 문제는 모든 장애인의 문제이다. 장애인의 발생이 자연 발생적인 차이의 문제라면 장애인 단체가 이익 단체가 아니라 인권단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서로 교차해야 하고 만나야 한다. 설사 그것이 내키지 않고 싫고, 귀찮다 하더라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그게 차별철폐이기 때문이다. 다중 억압에 있는 장애인 문제를 장애라는 억압문제만 덜어 낸다고 해결 되는 것인가? 애초부터 장애라는 문제는 한 인간에게서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뿐더러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에게서 이를 해결해 준다고 그 사람을 억압에서 해방한 것인가? 장애 억압이든 다른 억압이든 중요한건 사람에 대한 억압이고 차별이란 것이다. 사람은 실체가 존재하지만 장애란 실체는 그저 개념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개념에 집중해야 하는가? 실체에 집중해야 하는가? 한때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사회운동의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장애인 운동이, 장애여성의 존재성을 제일 먼저 이끌어냈던 장애인 운동이 퇴행하는 것은 바로 장애인 운동이 사회 문제와 인간 차별 혐오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교육현장서 ‘다문화’란 말 쓰지 말자”」 (경향신문, 2019.02.21.)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교육현장에서 쓰지 말자는 제안이 나왔다.전남도의회 교육위원회 최명수 의원(민주당·나주)은 21일 “전남도교육청 업무보고에 다문화가족 학생들에 대한 지원사업 개선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최 의원은 “ ‘다문화가족’이라는 말은 ‘국제결혼’ 또는 ‘혼혈’이라는 차별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들어 있다”면서 “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최 의원은 또 “다문화가족 학생은 필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취약계층으로 분류돼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해당 학생들의 거부감이 있고, ‘다문화’란 명칭이 학생의 호칭과 별명으로 변질되는 등 문제점이 많다”고 개선을 요구했다.

2)한 유명한 정치인의 정신장애인 비하 발언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만큼 인식은 민감해졌으나 그 민감해진 인식만큼 구체적인 실천을 하고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3)한편으로 장애인 고학력자들은 종종 다른 장애 유형들의 관계자들에게 혐오당하거나 소외당한다.

4)출처: www.nonviolence.wri-irg.org/ko/resources/2011/jendeolan-mueosinga?language=ko

5)참조 「11살 파키스탄 소년, 국내 첫 난민 장애인 등록」 세계일보 2018-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