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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대학생),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친절과 애정으로 구원한 사람들 ‘청춘’을 인권으로 완성하다 (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21 16:50
조회
334

1. 차별과 학교 폭력을 견디게 해준 어린 시절을 지켜준 사람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나는 75년생이다. 1980년대 받아주는 유치원이 없어 동네 미술학원 원장실에서 친구들이 율동을 배울 동안 열심히 선긋기, 색칠하기를 했다. 공립 초등학교 9곳에서 입학을 거부당하고 부산의 한 사립학교에 문의 했을 때, “저희 학교는 학생을 구별해서 받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이름 모를 동래초등학교 선생님. 추첨할 뿐이라던 그 학교는 6명을 선발하는 제비뽑기에 모두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나를 볼 때 마다 언제나 어디든 동행해 주던 짝지, 주.양.익. 이후 대학 때는 소록도에서 어르신을 위해 열심히 뻥튀기를 하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기를 잘 못해서 매일같이 전화를 해도 뭐든지 신나게 답을 도와주던 박.종.현. 먼거리를 갈 때 마다 늘 차를 태워주던 조.수.현. 바지에 실수를 했어도, 먹물을 뒤집어 쓰고 있어도 내 옆에서 묵묵히 미술 시간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 주었던 조.민.정.


 받아쓰기를 못했던 나를 위해 1학년 김.인.선 선생님은 3학년에도 담임을 맡았고 5시 반 퇴근시간까지 습자지에 받아쓰기 연습을 하던 내 곁에 있어 주셨다. 엄마를 기다리는 나에게 라면도 자주 끓어 주셨던 당시 수위 이.또.범 아저씨.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절묘하게 잡아 사진으로 남겨주셨던 5학년 담임 미술가 이.승.희 선생님. 그 밑에는 항상 멋진 자세 멋진 모습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겨우 깨친 한글로 중학교 첫 국어 시간에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내가 좋아 하는 것들’을 모방한 내 작품에 내가 본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찬해 준 국어 선생님. 당신의 그 칭찬이 지금 글 쓰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난 인연들이 중고교 시절의 그 힘들었던 학교 폭력도, 처절했던 따돌림도 견디게 했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켜 주었다.


휴전선 최전방 특수부대 야전 훈련 같았던 청춘 생활의 버팀목.


 1995년 2월 27일 서울역 새벽 4시 반 신촌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혼자 하는 서울 생활에 공황과 같은 공포에 휘감겨 있을 때,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씨익 웃으며 던진 말 한마디.

 '뭐 어때? 그냥 한번 해봐아'


 늘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그 말은 내 심장의 가장 튼튼한 목발이 되었다.


 대학에 온 첫날 모든 구성원은 신입생 오티를 가버렸고 전 세계에 목발을 짚은 사람은 나 혼자 인 것처럼 여겨지고 산꼭대기에 있던 일반 기숙사는 신청할 수 없었던 그때, 선뜻 국제기숙사에 전화해서 빈자리를 알아보고 자리를 만들라 했던 얼굴도 모르는 학생처 직원.


 지나가는 학교 오솔길 500미터가 오천 미터 같은데 생전 처음 만났던 다양한 피부색깔 사람들 앞에서 넌 누구냐 하며 먼저 말 걸어와 벤치에 앉혀놓고 기숙사 입소 절차를 일사처리로 처리해주고는 나중에 기숙사에서 커피포트 하나로 해먹을 수 있는 모든 자취 요리를 알려주던 아웃사이더 아닌 아웃사이더 과 선배.


 1995년 3월1일 새벽 5시 30분 외국인 기숙사 안터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6시 30분 처음으로 만난 룸메이트 가나 왕족 兄, 그는 늘 그 특유의 체취로 내가 힘들까봐 샤워에 신경을 썼고 내가 신입생이니 영어 써야 한다고 늘 방에서는 영어로 나에게 질문을 해주었다.


 혼자서는 기숙사 아침 식사를 챙겨 먹을 수가 없어서 늘 참치캔 하나로 식사를 때우던 나에게 어느 날 아침 거나하게 대만식 탕수육을 만들어 주던 말 없던 어느 대만 누나.


 어렵사리 전공학과 첫 수업을 마치고 만난 62명의 과 동기들은 거의 하루 종일 나에게 인사하고 반가워했다. 그 이후 한 학기 동안은 항상 내 옆에 그들이 있었다.


 1995년 3월,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노제가 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리고 있었고 난 신입생 오티를 못갔다는 이유로 93학번 선배와 함께 과 모꼬지를 사전 답사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쿵저러쿵 아무말 없었던, 그 선배는 나에게 모든 것을 목격하게 했다. 난 그날 인생 처음으로 최루탄을 맞았고 전두환이 나쁜 놈인 걸 알았다.


 첫 우이동 모꼬지에서 만난 사람마다 모두 나에게 시집을 한 권씩 주었고 그 시집 첫머리엔 모두 빽빽이 나에게 주는 편지가 적혀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어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중 장애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6년 연세대 항쟁
사진 출처 - 구글


안경선배와 민중가요 ‘전화 카드 한 장’


 1박2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촌에서 기숙사로 가는 길은 미끄러웠고 외로웠다. 나와 정반대의 길에 사는 94학번 동갑내기 선배는 신촌역에서 기숙사까지 나와 80분을 함께 했는데, 그녀는 나를 바래다준다거나 걱정된다거나 하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우산을 쓰지도 않았고 씌어주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걸었다. 노래를 차례대로 불러 주면서.

 긴 생머리, 늘 조용하고 무섭기까지 한 안경선배의 안경에는 온통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물 맞은 머리결에서 물안개가 뽀얗기만 했다. 그렇게 그 안경 선배는 나에게 '전화카드 한 장'이란 민중가요를 나즈막이 불러주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에게 전화해도 좋다고 해준 비장애 친구였다.


 새내기 한학기가 다 끝나고 갈 곳도 못 구하고 기숙사를 비워야 했을 때, 오다가다 만난 재미 교포 형은 어느 날 제일 먹고 싶은 과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과일, 그러나 내가 제일 사먹기 어려운 '수박'을 이야기 했다. 한 시간 뒤에 학교 오솔길 야외 테이블에서 남자 두 명이 커다란 수박 반덩어리를 하나씩 들고 머리 박고 먹고 있었다.


 결국 신촌의 어느 하숙집도 장애인 학생을 하숙생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자취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주던 아웃사이더 과 선배와의 신촌 옥탑방살이는 좌절되고 학생회관 동아리 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총학생회실 바로 옆에서 적십자 동아리방에서 먹고 자고 화장실에서 씻는 생활을 한 지 일주일 지날 무렵 처음보는, 딱 봐도 부잣집 아들 같은 동아리 선배가 불쑥 자기집으로 가자했다. 태어나서 나는 옷방을 따로 가진 강남의 저택을 처음 보았다. 거의 5개월 만에 갓 지은 밥에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 있었다. 선배는 내가 왜 동아리방에서 방학을 보내는지 묻지 않았다.


 1996년 8월, 저녁마다 짜장면을 사주던 총학생회실이 긴박해졌다. 어느 날, 전공도 알 수 없던 선배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브란스 병원으로 뛰어갔다.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엔 경찰의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입술이 부르튼 같이 짜장면과 군만두를 나눠먹던 총학생회 누나들과 형들이 있었다. 그 중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형이 나에게 다가와 같이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냐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총학생회실에서 나만 보면 그는 탕수육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학교 정문 옆에 병원입구를 나서는데 경찰들이 엄청나게 길을 막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옆에 형은 누구냐고 어디 갔다가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세브란스의 재활병동에 가는 길이라고 했고 나와 전혀 닮지 않은 한총련 간부를 친형이고 내 보호자라고 했다. 신촌역까지 5번의 검문이 있었지만 정문을 나와서는 누구도 우리를 잡지 않았다. 서슬 퍼런 전경들도 초록색 어깨 완장을 얹은 간부들도 어여 비켜주라고 했다. 96년 연세대 항쟁이라는 역사 현장에서 내 장애와 내 목발은 아무도 모르는 투사가 되었다. 장애인이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들을 속였다는 것이 더 짜릿했다.


 신촌역에서 만난 나만 보면 구박하던 여자 선배는 화장실 앞 자판기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여자 화장실로 나를 끌고 갔다. 무서웠지만 그 선배는 조용히 울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는 생리대 45개를 내 온몸 구석구석에 붙여 놓고는 튀어나오지 않게 압박 붕대로 감더니 우리 학교 제일 높은 곳 종합관으로 배달을 부탁했다. 목발을 짚고 있으면 유일하게 몸수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합관에는 갇힌 채 보름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생리대를 처음 보았고 처음 몸에 붙여 보았고 목발을 사용할 때 겨드랑이에 사용하면 훨씬 덜 아프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탈출시킨 학생 운동하는 사람들은 늘 분단이 한국사회모순의 출발점이며 분단 조국의 '통일'만이 이를 해결하고 장애 해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노동 해방을 이루면 장애 해방도 이룩된다고 했다. 그들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단지 궁금해졌다. 노동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하숙집에서 쫒겨나야 되는건가? 노동 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도서관도 못가고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오줌통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건가?


 민주 광장에 모였다 하면 일만 명이 족히 되었던 그들, 저들 중 백 명만 있으면, 아니 50명만 있으면 당장 경사로를 만들 수 있는데, 당장 점자책이라도 구비할 텐데. 저들은 일만명이나 모였다면서 경찰에 걸려 내가 탈출시켜야 하는 걸까? 정말 궁금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