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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산림(山林) 혹은 곡학아세(曲學阿世) (강국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7:32
조회
396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우리는 어떤 사람을 언급할 때 직책을 붙이는 걸 당연시한다. 그냥 이름 석자만 붙이는 건 뭔가 예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직책을 붙이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제대로 붙이면 핵심을 꿰뚫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지만 반대 사례도 흔하다. 성완종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과 성완종 전 의원은 같은 인물이지만 어떤 직책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완종 게이트'는 천지차이로 성격이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본적으로 이름만 표기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평가받는 것이지 직책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 정종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있다.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직책을 붙인다면 그는 교수였고, 장관이었고, 국회의원 당선자다. 각 직책은 꽤나 다른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가 장관으로 취임할 당시부터 퇴임할 때까지 행정자치부 출입 기자였던 덕분에 그를 나름대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부터 나는 정종섭이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면 항상 머리에 떠오르는 낱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산림(山林)이고 다른 하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다. 역사용어와 고사성어가 떠오른 건 아마도 그가 아버지한테서 한학을 배웠고 개인전을 열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정종섭 '교수'는 서울대 법학과에서 헌법을 가르쳤다. 지방재정이나 지방행정에 문외한이다. 행자부에선 전례가 없는 장관 이력이었다. 이 때문에 박근혜가 개헌을 하기 위해 정종섭을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다. 실명을 밝힐 수 없는 한 로스쿨 교수가 정종섭 '교수'를 평한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헌법학을 전공한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참여정부까진 '진보'인양 하고 다니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보수'로 확 돌아섰다. 한 자리 하려는 욕심이 대단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종섭 '교수'는 책임총리제, 특별검사제, 예산법률주의 등을 주창했던 분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안전행정부는 행정자치부와 인사혁신처, 국민안전처로 쪼개졌다. 정종섭은 마지막 안전행정부 장관이자 첫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다. 인사청문회에서 그가 1985년 군법무관으로 입대해 군복무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얄궂게도 그는 참여정부 당시 인사청문회 도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014년 여름쯤 만난 한 학자는 "정 교수를 얼마전에 만났는데 '현재 인사청문회 제도가 너무 엄격하다. 제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했다.


어쨌든 그는 장관이 됐다. 하급직원들 사이에선 인기가 괜찮았다. 하급직들 신경을 많이 써주려 했다. 회의를 줄여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줬다. 실국장들 브리핑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도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대외적으로는 여러 차례 문제를 드러냈다. 국회에서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주민세 인상 문제가 물 건너간 것은 작은 사례일 뿐이다(참고로, 나는 주민세 인상 지지한다). 대표작은 2015년 8월 새누리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만찬 건배사로 '총선 필승'을 외친 게 아닐까 싶다(그 후로 한동안 '총선 필승'은 내 단골 건배사가 됐다. 주어는 없다).


정종섭 '장관'은 당시 새누리당 연찬회에 초대받지도 않았다. 제 발로 찾아갔다. 그것도 비서실에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며 수행비서 없이 혼자서 찾아갔다고 들었다. 공식 해명은 '의원들이 건배사를 시켜서 당황해서...'였지만 다른 증언도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지역구별로 있는 자리에 자기가 먼저 와서는 건배사를 제창했다.' 보도가 나오고 일요일 아침 8시쯤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11시에 기자회견 준비해라"고 시켰다. 덕분에 대변인은 기자들 원성에 시달렸다. 그날 기자회견에서 나는 '국회의원 출마 의지'를 재차 물었다. 그는 그때 분명히 대답했다. 자신은 국회의원 출마할 생각 없다고. 물론 그 말을 믿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SSI_20151108143028_V.jpg지난 2015년 11월 8일 긴급 브리핑을 갖고 장관직 사의를 표명하고 있는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정종섭 '장관'은 2015년 11월 8일 장관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발전과 박근혜 정부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하겠다고 했다. 총선 출마 질문에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 말대로라면 그는 꽤나 성급하게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류성걸을 경선에서 제치고 대구 동구 갑 선거구에서 공천을 받았다. 무소속 류성걸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류성걸과 경북고 동기동창이다. 그는 경선 당시부터 '진실한 친박' 이른바 '진박'으로 자신을 알렸다. 그는 자타공인 '진박'이다.


정종섭은 아마 자신이 조선 시대 '산림'같은 존재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정치권은 날이면 날마다 욕만 먹는 존재이고, 정부 관료들은 무능하다, 이런 때 국가를 운영할 역량은 오히려 자신 같은 이에게 더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산림이란 학식과 덕은 높지만, 과거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해 존경을 받는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림은 특히 조선 후기 공론을 좌지우지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검소하게 살자' '공부 열심히 하자' '바르게 살자'는 평론가 정치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이 될 턱이 없다. 대표적 산림인 김집이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며 김육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 건 유명한 일화다.


조선 시대 산림은 재야에서 고고한 척이라도 했지만 정종섭 '의원'은 친박 돌격대로 마음을 굳힌 듯하다. 그는 24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청문회 활성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 "의회독재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위헌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그는 2005년 4월 국회 공청회에선 "국정운영 중심은 대통령에서 국회로 전환돼야 한다"며 상시 청문회를 지지했다. 그는 교수 시절 '헌법학 원론'에서는 정부시행령에 대한 국회 통제권 보장이 필요하다고 썼으면서도 지난해 6월 국회법 개정안 논란에선 침묵을 지켰다.


내 눈에 비친 정종섭은 산림에서 발탁된 선비가 아니다. 그는 ‘사기(史記)’에 나오는, "학문을 굽혀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한다"는 '곡학아세'하는 사람일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정치인의 기본 자질 가운데 하나인 '권력의지' 하나만큼은 확실한 분인 듯싶다.


이 글은 2016년 5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