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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각자 쓰고, 각자 주장하고, 그 판단은 우리사회가 해야 한다 (홍성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41
조회
584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


이번에 쓰는 글은 전부터 쓰던 글과 주제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요즘,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때문에 온 사회가 반대 여론으로 들끓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지난해 제법 큰 논란을 일으켰던 김상구 저 “김구 청문회”를 아는가. 이 책에서 김구(金九)는 누구나 인정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요, 조국 통일의 제단 위에 흉탄으로 쓰러져 간 애국자이다. 감히, 훼손할 수 없는 김구의 그 명성에 대해서, 그것은 김구 자신과 지지자들, 그리고 대표적인 “친일파” 이광수(李光洙)가 공모하여 저지른 ‘역사 왜곡’이며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김상구라는 “재야 사학자”는 이 책을 통해 주장했다.


사실, 아주 오래 전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을 때부터 약간의 의혹이 있었다. 가령, 동학혁명군을 학살한 양반지주의 민병대(民保軍) 사령관 안태훈(安泰勳)-안중근(安重根) 집안이 동학군 출신이라는 김구를 거두어들이고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것도 수상하고, 일본군 정보장교를 치하포에서 때려 죽였다는데 김구는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인 자를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등등의 의문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본 인상적인 얇은 책 한 권이 있다. 최갑룡이란 사람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주요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의 활동을 정리한 “황야의 검은 깃발”이란 책이다. 거기에 보면,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의거 후 일제의 탄압과 검거를 피해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오르고, 거액의 현상수배범이 된 김구는 자싱(嘉興)으로 도피하여 숨어 지낼 때의 일을 몹시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최갑룡의 책에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이 자싱으로 찾아가 김구를 혹독하게 꾸짖는다. “엄청난 거사 후 정부의 수반(김구)이 숨어서 젊은 여인과 ‘윤락(淪落)’에 빠져 지내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김구의 비서 안공근(安恭根)이 공금까지 횡령했다고도 한다. 그 후, 김구는 정신을 차리고 임시정부를 수습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백범일지에는 “먼 타국의 노(老)혁명가인 자신을 목숨을 걸고 불철주야 보살펴 준 중국 여인 주아이바오(朱愛寶)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헤어질 때 여비조차 변변하게 주지 못한 연민..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움.. 분명히 ‘윤락’같은 육체적인 관계는 아니다. 또, 안공근도 공금 문제가 아니라 피난 중 안중근 의사의 가족 보호를 소홀하게 처리한 것으로 질책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튼,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에 대해 각자 다른 기억과 기록이 동시에 있다. 무엇이 진실일까. 솔직히 난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 나는 “공공근로”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때 일했던 곳이 “광복군동지회”라는 단체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여기서 광복군이란 임시정부의 군대이고, 회원들은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이다. 어느 날 회장님에게 조심스레 여쭈었다. 자싱의 피난처와 양쯔강(楊子江) 위의 배에서 김구와 그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그랬다. “난 모르지.. 다만, 언제 죽을지 모르고 쫒기는 불안한 사내와 그를 돕는 젊은 여인이 좁은 배 안에서 종일 함께 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광복군동지회의 주요한 행사는 제사다. 1월 15일 동작동 현충원에서 치르는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장군에 대한 제사와, 수유리 이시영 선생 묘소 아래 무후선열(無後先烈) 비석 앞에서는 중국에서 항일작전 중 자손도 없이 죽은 젊은 옛 동지들에 대한 합동 제사가 5월에 있다. 처음 출근해서 한 일이 지청천 장군 제사의 보조였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제사를 마치고 언 몸으로 찬 건물에 모여 식사(飮福)을 하는데, 좀 이상했다. 추운데도 서로 멀리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어느 한 분에게 여쭈었다. “저쪽은 온풍기도 있고, 저분들과 함께 모여 드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 분은 웃으며 “1지대는 ‘좌파’야!”라고 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는 듯 현기증이 일었다. 70년이 지나서도 좌파라니!


광복군 1지대는 혁혁한 무장투쟁으로 유명한 조선혁명당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대에서 출발했다. 조선의용대는 내부 사상투쟁을 겪고 둘로 나뉘어 상당수의 대원이 옌안(延安)의 중국공산당 해방구로 들어가 소위 “연안파” 공산주의자가 되고 나머지는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된 것이다. 반면, 2지대는 이범석(李範奭)으로 대표되는 강경한 우익 민족주의였다.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화요파 공산주의자에 의한 암살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노병들에게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비교적 뒤에 성립하는 김학규(金學圭)의 3지대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나 장준하(張俊河) 선생처럼 일본군을 탈출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성립이 되었다. 이범석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김학규는 정치범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김원봉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해방 후 종로경찰서의 “친일 경찰” 노덕술(盧德述)에게 고문당하고 월북해서 고위직이 되었다가 끝내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아무튼, 생사를 함께 한 전우였어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영원히 다른 것이다. 후대에 아무리 통합해서 역사를 좋게 저술해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는 노래, “바람이 분다”를 들으면, 그런 것이 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에 대해 각자 다른 기억과 기록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정치적, 사상적, 실천적 입장에 의해 전혀 다른 기억과 기록으로 계승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구는 김원봉이 아니고, 같은 김구를 읽어도 나는 다른 김구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생각해 보자. 모두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국가가 단일한 역사(國史)를 정리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 정권의 입장이 반영되어 ‘친일’과 ‘독재’가 정당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기저에는 국가가 ‘위험한 국사’로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를 “세뇌(洗腦) 교육”을 시킬 것이라는 공포심이 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세뇌가 될 것이라는 것은, 조금만 역사를 이해하거나, 우리 세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시작은 대개 부당한 현실을 마주할 때 일 것이다. 국가의 공식적인 설명이나 사회의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에 괴로운 사람은 반드시 그것 밖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에 1980년대 베스트셀러가 “해방전후사 인식”이었다. 거기에는 그때까지 배운 국사책에는 없는 내용이 많았다. 또, 지금도 학교에서 노동의 권리를 가르쳐 주지 않지만, 졸업생 대부분은 노동자가 되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면서 “노동해방의 역사”를 배울 수밖에 없다. 왜곡된 역사교육으로 악명이 높은 일본의 아베 정권하 젊은 세대가 최근 “아베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거리로 나와 투쟁하는 것도 언론을 통해 알고 있다. 오히려 너무 학교 교육에 많은 가치를 두는 이 사회 통념이 세뇌교육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현행의 “국가 검인정 하의 한국사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그것 또한 국정교과서 같이 국가가 인정하고 허락한 내용만 담도록 강제하고 있다. 결국은 같은 것이다. 일본도 국정교과서를 만들지 않지만, 검인정 제도를 이용해서 국가 권력의 요구대로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국정 교과서 반대론자들은 검인정 교과서는 다른 것처럼 대중을 호도하고 있다. 그래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만 나쁘고, 다른 출판사 교과서는 좋은 것이라고.


나는 현재의 검인정 제도로 만들고 있는 한국사 포함, 일체의 교과서에 반대한다. 국가 권력이 교과서를 만들어 “국민 교육”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에게 예의바른, 충성하는 군인과 그들을 위해 생산하는 “근로자”를 만드는 것이 원래 의도였으니까. 그 방식이 soft하던, hard하던 간에.


n-DEFAULT-large570.jpg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나는 이참에 “교과서 자유발행제”가 우리시민 사회의 ‘공론’이 되길 희망한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서로 다른 입장으로 서술이 가능하다. 나도 현재의 주류 역사에 많은 이견이 있고, 내가 한국사를 쓴다면 분명히 현재의 교과서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교과서의 자유발행이 가능하다면, 다양한 우리사회를 반영해서 수백 수천 종의 교과서가 출현할 것이다. 그냥 대형서점 가판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자체로 우리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아마도 보수 우파)는 그것이 ‘혼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주요한 몇 가지 교과서가 가장 많이 읽힐 것이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marketplace of ideas) 원리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수자에게도 자유롭게 사상을 경쟁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과 사상에 대한 판단을 국가 권력이 아닌 시민들 각 개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나는 늘 시장을, 시장의 지배자 자본을 국가가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야 시장의 다수 약자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에서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주의자들을 혐오해왔다. 하지만,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좋을까? 결코 아닌 것도 있다. “사상의 자유”와 “자유 시장”은 분명히 다른 범주의 문제이다. 그래서 교과서의 자유발행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첨언을 한다.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 의원에게 이 문제를 ‘의탁’하거나 ‘연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그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예산 등, 이른바 “박근혜 표 예산”이 포함된 2016년도 예산안을 여당과 합의하여 ‘무수정 통과’시켰다. 지금도 겉으로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의 소리를 높이고, TV를 통해서는 그런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 아래에서 당의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정치집단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늘 그랬다. 늘 자유주의적 개혁을 말하며 “수구 꼴통” 정치세력과 대립각을 세우지만, 언제나 부패했고 배신을 해왔다. 국회의 과반 의석과 대통령을 가졌을 때도 그랬다. 따라서 그들의 “자유주의”는 믿을 수 없으며, 반드시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져야 할 것들이라고 본다. 올바른 시민운동이라면, 스스로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맞서 싸워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쟁취해야 한다.


이 글은 2015년 12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